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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자, 교육자, 사업가 남강 이승훈장로

남을 위해 산사람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1/30 [04:01]

애국자, 교육자, 사업가 남강 이승훈장로

남을 위해 산사람

최재건 | 입력 : 2021/01/30 [04:01]

                                                 애국자, 교육자, 사업가

                                                    남강 이승훈장로

 

 

 

3.1운동 99주년…신앙의 저력 보여준 독립운동가들- 데일리굿뉴스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1864-1930)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업가요 선각자요 교육자요 애국자였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후진이나 동포를 위하여 한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내가 한 일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그렇게 시키셨을 뿐 입니다.”라고 그의 동상 제막식에서 말할 정도의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그의 비석에 새겨진 일생을 남을 위하여 살았고 자기를 위하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이승훈이었다.

 

고당 조만식은 영결식장에서 그를 기리며 남강은 조선에서 낳고 조선을 위하여 울고 웃고 조선을 위하여 죽었다라고 하였다. 함석헌은 나는 이때껏 저만큼 광휘 있게, 저만큼 뜨겁게, 저만큼 기운차게, 저만큼 참되게 산 이를 보지 못하였다라고 회고하였다.

그는 젊어서는 일신과 가문의 영달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장년에 이르러서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바쳐 31운동을 주도하고 오산학교를 세우는 등 민족운동에 매진하였으며, 사후에는 유해마저 학생들을 위해 생리학 표본을 만들도록 내어놓았다.

 

1. 실업가 이승훈

이승훈은 1864325일 평북 정주(定州)읍 언저리에서 아버지 여주 이씨 이석주(李碩柱)와 어머니 홍주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승훈(昇薰)은 자()로서 호()는 남강(南岡)이고, 본명은 인환(寅煥)이며, 아호는 승일(昇日)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텃밭을 일구는 일 외에 별다른 생계능력을 갖지 못해 어머니가 품팔이로 살림을 꾸려가다 승훈을 낳은 지 7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남은 가족은 승훈이 여섯 살 되었을 때 일자리를 찾는 아버지를 따라 정주읍 가까이 놋그릇 생산지로 유명한 납청정으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서 승훈은 일년 여 동안 서당을 다니며 소학(小學), 맹자(孟子) 등을 배우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10세 되던 해에 아버지마저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이승훈은 11(1874)부터 납청정의 대부호이며 관직을 돈으로 사서 박천(博川)군수라 불리는 임일권의 유기점에서 사환노릇을 하며 지냈다. 이승훈은 상인들 틈에서 잡일을 하는 틈틈이 버려진 종이에 글을 쓰며 공부하지 못하는 한을 달랬다. 15(1878)가 되어서는 한 동네 사람인 전주 이씨 이도제(李道濟)의 딸 경강(敬康)과 결혼했다.

결혼 후 본격적으로 상인의 길을 밟았다. 보부상으로 평안도 및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전전하면서 자본을 모았다. 24(1887) 때는 또 다른 부호인 철산의 오삭주에게서 돈을 빌려 납청정에 유기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민족기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공장경영방법을 개선했다. 첫째 노동환경을 일신했다. 둘째 근로조건개선에도 힘썼다. 셋째 근로자의 신분이나 계층에 구애됨이 없이 평등하게 그들을 대접하였다. 그 결과 근로자들의 작업의욕이 북돋아저 생산능률이 향상되고 품질도 좋아졌다.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이어 청일전쟁이 일어나 한반도가 전장화되자 납청정의 이승훈의 상점과 공장은 잿더미가 되었다.

덕천으로 가족과 함께 피란갔다 돌아와 철산의 오희순(吳熙淳)의 자본을 얻어 상점과 공장을 재건하였다. 1901년 평양에 진출, 본격적으로 무역업에 손을 대 진남포에 지점을 설치하고, 서울·인천을 왕래하며 사업에 성공해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다시 사업에 실패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그 사업은 평양에 지점을 둘 정도로 성장하였으나, 그는 자신을 신뢰하는 오부자에게서 빚을 탕감 받고 2만 냥을 새로 얻어 사업을 다시 일으켰다.

그 후 자신의 가문을 세우기 위해 납청정 서남쪽에 있는 오산 용동(龍洞)으로 이주하고 친척들을 불러 모아 여주 이씨 집성촌을 만들었다. 또 참봉이란 벼슬을 사서 양반의 꿈을 이루었다.

38(1901)에는 평양에 상사를 차리고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해외 수입품을 파는 무역업을 시작하여 거부가 되었다. 그는 석유, 양약, 지물, 도자기, 건축자재, 면포, 일용잡화 등 모든 품목을 다루면서 국내 제일의 무역상이 되었다. 또 서울과 평양 간 운송회사를 세워 한국 최초로 운송사업을 시작하였다. 1902년에는 부산의 엽전 가치가 서울보다 두 배나 더 높은 것을 알고 서울에서 엽전 1만 냥을 수집하여 배편으로 내려 보냈다. 그러나 그 배가 일본 영사관 소속선과 충돌하여 침몰되고 말았다. 그는 소송을 제기하여 부산에서 얻을 이익금 2만 냥을 배상토록 일본 영사관에 요구하였다가, 많은 시일이 지난 후에 겨우 본전 1만 냥을 받았다. 그는 또한 옥수수와 명태를 대량으로 사들였다가 큰 손해를 보았고, 러일전쟁 때는 군수품의 폭등을 예상하고 우피 2만장을 매점하였다가 의외로 전쟁이 빨리 끝나고 값이 폭락하자 헐값으로 방매하였다.

이와 같은 거듭된 실패 후에 그는 한 동안 향리로 물러나 칩거하였다. 1907년 어느 날 평양거리를 걷다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들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삼켜 먹으려고 하고 있으니 온 국민이 구습을 벗어버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서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남강은 즉시 그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버리기도 결심했다. 14살이나 어린 안창호에서 허리를 숙이면서 단발, 금연, 금주를 다짐했다. 그러다 평양에서 안창호를 만나면서 신민회의 간부로 활동하게 되었다.

한편 다시 사업도 시작했다. 1908년 평양 마산동에 자기회사(磁器會社)와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세웠다. 이 때로 부터 그는 오직 민족을 위해 기업활동을 하였다. 자기 회사는 일본 도자기의 유입으로 유기산업이 도산위기에 빠지자 평양의 유지들과 뜻을 모아 세운 것이었다. 평양과 서울에 설립한 태극서관은 전국 각지의 신흥 교육기관들을 위해 신지식과 애국심을 고취할 서적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또 이탈리아 중개무역상인 파마가 인천과 서울에 점포를 두어 운영하는 파마양행(巴馬洋行)과의 거래를 시도하였다. 그것은 직거래로써 수입상품의 가격을 낮추어 일본을 통한 수입상들과의 판매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여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 대항하려는 의도에서 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파마양행 지배인이 병으로 귀국하고 이승훈 자신도 안명근 사건으로 투옥되면서 좌절되었다. 그의 투옥으로 자기회사도 일본인에게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그는 실업가로서 매점매석을 행하는 부정적인 모습도 보였지만, 공장을 운영하면서 노동환경과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정직한 상거래를 중시하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종국에는 명리를 떠나 경제적 측면에서 민족운동을 도모하였다. 특히 외국자본의 침탈에 대항하여 지역별로 재벌을 결성하고 함께 국가산업을 건설하게 하자는 구상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2. 교육자와 신앙인으로서의 남강

이승훈은 1908(45)에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인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때는 그가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던 해였으므로 그의 민족의식은 기독교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 사랑이 민족을 구원한다는 신념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다.

남강은 1907년에 고향에다 초급학교인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세우고, 이어서 향교재산을 지원 받아 중등학교인 오산학교를 세웠다. 오산학교는 주기철, 한경직 등의 신앙인들과 김홍일 등의 독립 운동가들을 길러냈으며, 이광수, 조만식, 신채호, 염상섭, 유영모, 함석헌 등 유명 인사들이 교사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학교의 설립에는 안창호의 영향이 컸다. 학교뿐만이 아니고 오산교회도 세웠다. 오산 학교장에는 나부열( S> L. Robert) 선교사를 세웠다.

그는 오산학교를 세우면서 지금 나라가 날로 기울어져 가는데, 우리가 그저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 조상들이 살던 땅, 우리가 자라난 고향, 이것을 일본인에게 내맡긴다는 것이야 차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총을 드는 사람, 칼을 갈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한 것이 무엇이냐? 백성들을 깨우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교육사상은 경(: 하나님 신앙)ㆍ애(: 민족과 종교와 학교 사랑)ㆍ성(: 정직과 실천력)으로 요약된다.

오산학교는 새로운 학교 건물을 지으려 새 터를 잡게 되었다. 남강을 비롯한 교직원과 학생들이 함께 먹고 자며 노력한 끝에 마침내 1917년 새 교사가 완성되었다. 그것마저 31운동 때 일제의 방화로 교사가 불타버렸다. 교회도 불탔다. 그를 비롯한 조만식, 유승모, 박우병, 장지영, 백봉제, 현상윤 등의 노력으로 19197월 학교가 재건되었다. 며느리 마저도 하숙생을 치러서라도 재건축해야 된다는 의지를 힘입어 신축되었다. 1926년에는 오산고보로 승격되었다.

다음은 춘원 이광수가 작사한 오산학교교가이다.

 

네 눈이 밝구나, 빛 같다.

하늘을 꿰뚫고 땅을 들추어 온 가지 진리를 캐고 말련다.

참 다섯 뫼의 아이로구나.

네 손이 솔갑고 힘도 크구나.

불길도 만지고 돌도 주물러 새로운 누리를 짓고 말련다.

네가 참 다섯 뫼의 아이로구나.

네 맘이 맑구나, 예민도 하다.

하늘과 땅 사이 미묘한 것이 거울에 더 밝게 비치는구나.

네가 참 다섯 뫼의 아이로구나.(이광수 작사)

 

남강은 오산학교를 운영하며 실력양성론을 주창했고 그의 영향을 받은 조만식을 영입해서 교사로 삼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에게 학교의 경영권을 물려주려 하였으나 조선총독부 당국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이이화, 한길사, 2006)>

 

남강은 1910년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 모금을 하려 다니던 안중근의 사촌 안명근의 안악 사건에 연류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 중 뒤이어 일어난 105인 사건과도 연계되어 수감되었던 19112월부터 19152월까지 기독교 진리에 침잠하는 기회를 가졌다. 신약전서만도 백 번 이상 탐독하였다. 1913-14년 어간에는 성경읽기, 기도, 금식하며 영적인 삶에 전념하였다. 출옥 후에 감옥에서 어떻게 그리 기쁜지 몰랐어. 곧 당신이 내 머리 위에 계신 것 같아서 여섯 사람 중에 내가 학습만 받았으니 제일 초신자인 모양인데 제일 위로를 받은 모양이야. 전에는 믿는다는 것이 밤알을 통째로 물고 어물거림과 같고 지금이야 발겨먹는 것 같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1915년에 세례를 받았고 이듬해에 장로로 장립되었다. 1917년에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3.1운동 때는 기독교의 대표로 기독교와 천도교가 함께 하도록 앞장서서 활동하다가 구속되었다.

신학수업은 중단되었다. 그 후로 자신이 일할 교회는 일반 목사나 장로들이 섬기던 교회와 달리 동포의 교육과 산업을 발달시키려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학교 복학도 접었다. 영적관리는 철저하여 수감 중에 구약을 10, 신약을 40번 읽고 묵상하는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민족운동가적 성향이 강했던 까닭에 점차로 장로교단의 신앙 본위의 분위기와 거리가 멀어저 갔다. 1929년에는 조병옥과 함께 교회의 대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는 신우회(信友會)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그 운동마저 용두사미로 끝나는 것에 실망하고, 김교신의 무교회 그룹과 어울리기 시작하였다. 그 그룹의 일원인 함석헌이 1928년에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주일마다 성경연구 모임을 개최하였던 것이 그들과 함께 하게 된 계기였다. 이승훈은 1929년부터 그 성경연구회에 빠짐없이 참석하였고, 성서조선을 구독하였다. 서울 공덕동에 있던 성서조선사무실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는 마침내 본 교회 출석을 멈추었고, 19302월 평북노회에서 시무치 않는 죄로 장로직을 면직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진실한 기독교인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1930년 협심증으로 사거하기 수일 전에 오산학교에서 있은 자신의 흉상 제막식에서 그는 내가 오늘까지 온 것은 내가 한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이후로도 그럴 줄 믿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늘 의인은 신앙으로 산다는 사실을 굳게 붙들고 살았다. “장래 일을 알 수 없으니 이 다음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는 의를 위하여 죽으라면 조금도 사양할 생각은 없어라고 말하곤 하였다. 함석헌은 그가 학생들에게 를 힘써 강조하였고, “라는 말을 할 때면 하얀 수염 아래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3. 민족운동가 이승훈

 

우리가 할 일은 민족의 역량을 기르는 일이지 남과 연결하여 남의 힘을 불러들이는 일이 아니다. 나는 씨앗이 땅속에 들어가 무거운 흙을 들치고 올라올 때 자기 힘으로 들치지 남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을 본 일이 없다. 독립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19077월 평양 모란봉에서 안창호(安昌浩)의 강연을 들었다. “나라가 없는 민족은 세계의 상놈이요, 전 민족이 다 상놈이 되려는데 당신 혼자 양반 될 수가 있겠소?”라는 말에 충격을 받고 앞서 언급한대로 개인의 영달보다는 민족을 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금연·금주와 단발도 했다.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도 가담하였다.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대한제국이 몰락 후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기 위해 모금하다가 체포된 안명근 등과 함께 1911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1911년 가을에는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을 처치하기 위해 당국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사건을 조작한 105인사건이 일어났다. 유동열(柳東說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안태국(安泰國임치정(林蚩正), 옥관빈 등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애국지사가 잡혔다. 그중 105인만 고소 되고 99명이 무죄 석방되었다. 이승훈은 이 사건에도 연류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210월 윤치호 등과 함께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1542개월 만에 가출옥하였다.

191931 독립운동 모의가 시작되자 세력의 구축에 앞장섰다. 먼저 서울과 평양의 기독교인들이 힘을 모우도록 했다. 다음에는 기독교와 천도교 세력을 규합토록 했다. 마지막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3인의 서명 순서로 옥신각신 하자 죽는 순서라고 일괄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이일은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3·1운동으로 종로서에 구속되어 다른 47인과 함께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2년 가출옥해 오산학교로 돌아왔다. 민족대표 33인 중 그는 가장 마지막으로 19227월에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남강의 건강은 조금씩 나빠졌다. 고문 후유증 때문이었다. 한 번은 한 학생을 뒷산 계곡으로 데리고 가 목욕을 하며 등을 밀어 달라고 했다. 학교에 공동 목욕탕이 있었지만 남강은 이용하지 않았기에, 교사와 학생들이 좀 이상하게 여기고 있던 터였다. 학생은 옷을 벗은 남강을 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의 등엔 징그러울 정도로 흉한 상처 자국이 남아 있었고, 허벅지도 살점이 떨어져나가 푹 파여 있었다.

 

남강은 192212월에 일본을 시찰하고서 국민계몽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이상재, 윤치호, 김병로, 김성수 등과 주동이 되었다.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도 조직 되었다. 많은 뜻있는 이들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일제 당국의 불허로 대학은 설립되지 못했다. 또한 이상재, 유진태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설립했다.

다시 농과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오산학교는 당시에 부속병원까지 갖추고 있었으나, 그는 더 나아가 농과대학을 설립하여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는 종합교육체계를 세우려고했다. 연습림, 임해(臨海)농장, 직조공장, 제사공장을 세워 교육과 산업 현장을 연결하는 신교육도시를 건설하려고 했다. 교육시설과 교회와 주민 협동조합이 어우러진 이상촌(理想村)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자면회(自勉會)를 결성하였다. 이는 오산학교 학생들을 농촌운동 지도자로 양성하고 자면회로 조직하여, 그들을 통해 전국의 농촌에 새로운 이상촌을 세우려고 했다. 그의 사망으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1924년에는 동아일보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5개월 동안 사장직을 맡았다. 어려운 사태를 수습한 다음 김성수를 사장으로 복귀시켰다. 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하는 한편, 김성수, 송진우 등과 더불어 연정회(硏政會)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이 연정회는 일제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정치활동을 하자는 자치론을 주장하였다가 여론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실패로 종결되었다. 그는 김성수 뿐만 아니라 이광수와도 깊은 교분을 나누고 그의 민족개조론에 공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와 사상적 맥락을 같이 하는 자치론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1927년에는 민족진영과 좌익진영의 합작으로 신간회가 발족되었을 때 발기인으로 나섰다. 그러나 이내 양측이 대립하여 신간회가 소란스러워지자 그곳을 떠났다.

1915년부터 1919년까지 오산학교를 다녔던 고 한경직 목사의 회고담이다. “선생님이 불러 갔더니 이런 말을 하셨어요. 애국지사를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변해가고 있어. 다만 너희들은 분명히 알아 두거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나 이승훈은 조선 사람으로 살다가 조선 사람으로 죽으련다그 이야기를 하시려고 우리를 청했는데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단 말이에요.”

 

19305967세에 남강 이승훈 장로는 협심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강이 남긴 마지막 유언은 낙심하지 말고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해서 쓰게 하라.” 였다. 경성제국대학에 자기의 유골을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도록 교육용으로 기증 하려고했다. 이마저 실행되지 못한 채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뜻대로 유해는 학생들을 위한 생리표본으로 만들어졌지만 그의 뼈는 학생들과 조선 사람들에게 자극을 준다며 강제로 수습하고 그가 심혈을 기우렸던 오산학교 뒷산에 묻혔다.

 

남강은 애국 애족, 신앙생활에 철저했다. 교육진흥에 재산과 심혈을 기우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가문에서 이기백 같은 한국사학자와 이기문 같은 국어 학자가 나온 것도 되새겨 볼 일이다.

 

 

남강문화재단 편. 南岡李承薰民族運動. 남강문화재단출판부, 1988.

김기석. 남강이승훈. 세운문화사,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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