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민수의 항일활동과 항일노선의 변천
목차 들어가는 말 I. 항일의식의 형성 II. 숭실학교와 비밀결사 모색 III. 조선국민회의 조직과 박용만계 무장투쟁 노선 IV. 3.1 운동 때의 성진 만세운동 주도 V. 조만식의 계도와 복음주의 항일노선의 형성 VI. 농촌운동과 신사참배반대 VII. 미국 망명생활과 이승만계 노선 합류 나가는 말
들어가는 말
배민수(裵敏洙, 1896-1968)는 장로교회의 목사로서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에 뿐만 아니라 일제하 독립운동사에도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민족운동가와 농촌운동가 및 교육자로 활동했던 한편 연세대학교의 발전에도 공헌하여 여러 관점에서 연구되어왔다. 연세대학교는 그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일산의 부지에 삼애교회를 설립하고 기념관을 조성했으며, 학술적으로 2년마다 기념강좌를 개최하여 금년으로 제11회에 이르게 되었다. 기념강좌와 여러 논저들을 통해 발표된 그간의 연구내용을 보면 그의 기독교 농촌운동이 중점적으로 다뤄져왔고, 그의 삼애사상(三愛思想),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농촌을 사랑하고 노동을 사랑하자는 사상이 크게 주목을 받아왔다. 그러한 반면에 그의 반일, 반공 활동은 그다지 조명되지 않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배민수가 민족운동가로서 펼친 항일활동의 측면을 고찰하려고 한다. 그의 항일활동은 그의 선대를 계승 하여 일제 초기부터 시작되었고 3.1운동 전후 두 번에 걸친 투옥, 일제말기의 신사참배 강요에도 항거하였다. 그의 투쟁은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싸워야 한다.”(I must fight until we finish)고 했던 그의 각오처럼 초기부터 중도에도일제 강점기 말 까지도 변치 않고 시종여일하게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사회의 저명인사나 성직자들이 일제시대 말기에 변절했으나, 그는 끝까지 민족혼을 지킨 얼마 안 되는 애국지사의 대열에 섰다. 이 글에서는 이런 점을 고려하여 그가 언제부터, 어떤 동기에서, 특히 그의 항일투쟁 양태가 시간과 여건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살피려고 한다. 따라서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고 저항하는 가운데 표출된 그의 삶을 재조명하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I. 항일의식의 형성
배민수(裵敏洙)는 1896년 1월 8일, 충청북도 청주 북문로에서 배창근(裵昌根, 1867 - 1909)과 장희운(張喜云, 1867-1945)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청주감영 진위대 육군 보병부교였는데, 군대해산에 저항하여 이 지역의 의병운동에 투신했다. 1908년 8월, 일본 경찰 2명을 사살한 죄로 체포되어 천안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후, 서울의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되었다가 대심원 원심이 확정되어 1909년 8월에 처형당했다. 그는 의병운동 중에 파산하여 집마저 매각하고 기독교인인 친구 김응삼의 집에서 살면서 김응삼과 류문달의 인도로 선교사 밀러(F. S. Miller)를 만나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의 기독교에로의 개종은 영혼을 구원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나라를 구하는 길도 거기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개종은 초기 한국개신교 민족 운동가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외아들인 배민수는 아버지가 체포될 때 울면서 15마일을 넘게 따라갔던 일, 사형을 집행하기 일주일 전에 마지막으로 면회할 기회가 주어졌으나 여비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던 중에 퍼비안스(Walter Purviance)의 도움으로 서울에 가서 면회했던 일을 평생 가슴에 간직하였다. 배창근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1) 네 자신을 잘 돌보아라. (2) 어머니를 잘 모셔라. (3) 나라를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몸의 부귀영화만 생각하지 말고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살다가 천국에서 만나자는 요지의 말을 남겼다. 젊은(41세)의 아버지가 나라를 지키려고 의병이 되어 저항하고 기독교 신앙으로 살다가 가면서 남긴 마지막 말이 아들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지는 추론하기가 어렵지 않다. 배민수의 애국은 그의 태생과 기독교 신앙에서 기인한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민족의식과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배창근이 기독교에 입문한 후로 그의 신앙경력은 길지 않았지만 배민수는 그를 통해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고, 한평생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된 원초적인 계기가 되었다. 배민수는 부친 사후에 집안형편이 어려워 미국 선교사가 경영하는 청남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그곳에서 봉건적 전통관을 탈피하는 서구의 기독교적인 생활관을 체득했다. 집에서는 어머니와 누나와 더불어 가정예배를 통한 경건의 훈련에 힘썼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기독교신앙의 틀을 바르게 형성해갔다. 1910년 나라가 망했을 때는 친구들과 함께 먹물 표식을 하며 나라를 구하는 인물이 되겠다고 각오하고 기도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고 한 성구를 믿고 그대로 살면 우리나라가 주권을 찾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그가 삶의 목표를 분명히 정한 것은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 박사가 청주에서 한 연설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그는 예수의 뜻을 따르면 반드시 밝은 미래가 온다는 일관된 주장에 감명을 받고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어 나라와 민족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또 소학교의 친한 친구가 일찍 죽었을 때 그 죽음 앞에서 나라와 하나님을 위해 친구의 몫까지 다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부친 배창근이 한말에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일제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슬픈 사실은 그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고 한평생 그의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원초적 생각이 애국의 열정을 낳았고 기독교 사상과 합쳐져서 일본의 식민지주의에 항거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는 사명을 갖게 했다. 그는 선교사들과 국내 및 미국 기독교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회활동을 하는 가운데 한평생 인간은 자유롭고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믿음으로 이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힘든 길을 선택하며 살게 되었다.
II. 숭실학교와 비밀결사 모색
배민수는 17세 때 초등학교를 마치고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진학했다. 평양은 선교사들이 설립한 숭실학교와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를 기반으로 기독교와 연관된 자본가와 지식인들이 사회운동 세력을 형성하여 문명개화운동, 자강주의 신문화 운동, 실력양성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그는 이런 것 외에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서울의 경신학교보다 숭실이 더 보수적인 신앙을 체득하게 해줄 것이라는 그레이스 데이비스(Grace Davis) 선교사의 추천을 좇아 숭실 학교로 갔다. 학교에서는 모우리(Eli M. Mowry) 선교사를 만나 경제적 도움을 받으며 공부했다. 방학 때는 근로장학금을 타기 위해 일하면서 노동의 고됨과 중요성을 또한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그 기간에 나라의 독립을 함께 염원하고 실천하는 일에 뜻을 같이 하는 교우관계가 점차 확대되어 간 것이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신민회 회원들이 이미 민족의식을 고취시켜놓은 여파이기도 했다. 그에게 교우관계를 맺는 조건은 믿음이 좋은 기독교인으로서 민족과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자라야 했다. 그가 조건을 기독교인으로 한정했던 것은 자유와 희생의 정신이 오직 예수께로 부터만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었고, 민족애를 내세웠던 것은 애국심이 없는 삶은 죽음보다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존경하는 인물의 평가 기준을 물으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라고 답했다. 그의 숭실 초기의 동지는 김은현, 김지수, 노덕수, 이보식, 박인환이었고, 후에는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을 만나서 같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 기도하며 항일 활동을 모색했다. 1913년 여름에 배민수는 김형직, 노덕순과 무명지를 베어 혈서로써 일생을 민족을 위해 바치기로 맹세했다. 김형직은 강하게 뭉치면 민족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격려하기도 했다. 이 무렵에 배민수는 원초적인 항일활동의 추구 단계에서 벗어나 독립의 의미와 투쟁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체득한 기독교 청년운동가로 성장했다. 그는 만주의 무장투쟁, 독립전쟁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폭력의 사용은 기독교 신앙과 배치되는 것이지만 정의실현을 위하는 공의롭고 정당한 의미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민족의 독립을 얻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평양의 주류 민족운동 노선인 안창호의 무실역행(務實力行), 즉 실력양성 노선과는 다른 방법이었다. 그는 의병운동의 비타협적 항일의식과 투쟁 방식에 공감하였고 무장투쟁을 통한 항일 운동방식을 그의 독립노선으로 성장 시켜나갔다.
III. 조선국민회의 조직과 박용만의 무장투쟁 노선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1910년대에 한국을 무단통치 체제로 억압하고 수탈했다. 이러한 수난 속에 반일 운동이 태동되었다. 1907년에 미국에서 귀국한 도산 안창호가 서북지역의 기독교 세력과 연계하여 반일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여 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런 여건 속에 배민수는 학우들 사이에서 항일운동을 위한 교제관계를 넓혀 가던 나갔다. 1915년에는 서관조, 이도종, 강석봉, 그리고 하와이에서 돌아온 장일환을 만나 나라의 독립에 뜻을 같이하였다. 장일환은 배민수에게 자신이 하와이에서 독립군을 통합한 박용만과 노백린이 이끄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소속임을 밝히고 미주의 독립운동 상황을 전해 주었다. 박용만은 무장투쟁이 독립운동의 최선의 방책이라고 주장하며 미주에서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주도하는 한편 소년병학교를 세워 젊은 항일운동가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배민수는 자기와 같은 뜻을 가진 무장 투쟁 조직이 미국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했다.
“내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막 뛰었다. 나는 얼굴도 보지 못한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일환과는 가능한 한 자주 만나게 되었다. … 일환은 나보다 일곱 살이 많은 형뻘이었고 훌륭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평상시에는 온화한 미소를 얼굴에 담고 있었지만 조국의 독립을 갈구 할 때에는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그와 같은 친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1915년 가을에 마침내 그의 친구들을 중심으로 비밀조직인 ‘대한국민회 조선지부’가 결성되었다. 배민수, 김형직, 노덕순, 장일환, 서광조, 강석봉, 박세빈, 노선경(하와이에 있는 노백린의 아들) 등 30여 명의 숭실학교 친구들로 조직되었고,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 장일환이 회장이 되었고, 백세빈은 외국통신원이 되었으며, 배민수는 서기와 통신부장을 겸했다. 만주 안동에서 온 백세빈과 노선경에게는 하와이와 만주로의 연락책임을 맡겼다. 하와이에서 신문, 비밀편지, 사진 등을 백세빈에게 보내면 그들은 그것들을 평양의 지부로 보내는 역할을 했다. 평양 지부에서는 이를 토대로 전단을 작성해서 전국에 배포하기로 했다. 최달형, 김평두, 조옥조, 평양신학교 학생 유평섭 등도 가세하여 세력이 늘어났다. 회원으로 입회할 때는 자신의 암호명을 피로 써서 맹세해야 했다. 조선국민회 조선지회 운동은 1910년대에 세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볼세비즘이 대두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는 국내의 애국 청년 학생들이 지하조직을 형성하고 해외의 조직과 연대하여 무력항쟁을 하려고 했던 비밀결사운동이었다. 국민회의 활동계획은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다른 나라의 전쟁을 예측하고 국내에 구축한 근거지와 해외 독립운동 단체의 연계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대내적으로는 파업을 선동하고 철도와 군대시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미국이 일본과 전쟁하면 무력폭동을 일으켜서 박멸시키자는 계획까지 세웠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기로 하며 목숨도 내 걸었다. 모든 투쟁활동은 비밀리에 하도록 했다. 그 방법이 효율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회원 각자가 암호명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그들은 실제로 극비리에 무기를 사서 모우며 무력항쟁을 준비했다. 그들은 무력항쟁이 독립을 쟁취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확신하고 나아갔다. “우리는 항상 눈물로 기도하였다. 어떻게 조국을 해방시킬 것인가 하는 것만이 우리의 관심이자 희망이었다. 우리의 삶에서 애국심 외에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배민수는 1917년 크리스마스 때 전남 벌교의 양경수를 만나 독립운동을 지원하겠다는 의사표명을 듣고 고향인 청주에 가 있다가 1918년 1월 20일 토요일,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 전에 평양에서 장일환, 조옥조, 서광조가 만주에서 온 백세빈을 한 중국 식당에서 만나 국내외의 지하운동을 상의하던 중에 그들을 미행하고 그 대화를 엿들은 일본형사 나까무라와 조선인 김태석에 의해 현장에서 검거되었다. 심문 과정에서 고문을 못 이긴 백세빈이 모든 것을 자백함으로써 배민수까지 붙들리게 되었다. 이때 국민회 회원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연류된 친구들까지도 무고하게 곤욕을 치렀다. 취조 과정의 심한 고문과 부당한 처우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장일환은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으나 그 여파로 정신장애를 일으켜 석방된 후에 순국했다. 국민회원 30여명이 법정에 서게 되었다. 검찰의 구형사유는 아래와 같았다.
“몇 명의 불순분자들이 일본제국에 대항하고 조선의 독립을 꾀하기 위해 숭실 학교 안에서 국민회라는 조직을 결성하였습니다. 그들은 위험한 사상에 경도되어 평화롭고 안일한 나라체제를 뒤흔들어놓으려 했습니다. 제국과 국민의 평화를 위하여, 본인은 이들이 일본 국법항에 저촉되었음을 확인합니다.”
배민수는 국민회를 조직하고 모의한 혐의로 징역 1년, 김형직, 구영필, 서광조, 평섭은 10개월, 노덕순, 평두, 조옥조, 달형은 8개월, 그 외는 6개월의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배민수는 마지막 법정진술에서 구형의 부당성을 당당하게 피력했다.
“우리의 견해로는, 1910년 합방 이후 일본정부는 한국을 파괴하는 정책을 시행해왔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잘못된 정책과 폭력적인 지배에 대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법에 저촉되는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일본의 법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결성한 단체를 위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 평화와 정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독립을 쟁취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반란이라고 하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나는 일본제국의 국왕이라도 저와 같은 처지라면 같은 생각을 하리라 확신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검찰관의 구형에 동의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후 약 1년간의 영어생활 속에서도 나라를 위해 투옥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부친이 당한 비참한 사건을 생각하며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고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했다. 출감을 앞두고 드린 탄원기도에는 하나님과 나라를 사랑하는 그의 정신이 나타나있다.
“(전략) 왜 당신께서 그 사악한 일본인들이 모든 것을 차지하게 하고 아버지와 일환과 많은 선한 사람들을 내버려두셨는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많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의 짐승 같은 행위를 지켜보실 셈이십니까? 이제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 시기에 배민수는 비타협적이고 급진적 민족주의 운동에 뛰어드는 기독교적 민족의식과 실천관을 보였다. 그는 일제의 조선강점을 전면 거부하면서 민족해방에 대한 낙관적 희망과 열정으로 일본과 싸워 이겨 독립을 쟁취하자는 절대 독립노선을 추구했다.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할 당면목표는 다만 조국의 독립이라고 확신했다.
IV. 3.1 운동 때의 성진 만세운동 주도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평양 감옥에서 일 년 간의 형고를 마친 배민수는 1919년 2월 8일에 석방되었다. 그는 데이비스 선교사를 따라서 이사를 간 가족을 찾아 함경도 성진으로 갔다. 성진은 캐나다 장로교회의 선교지로 함경도 지역에서 가장 교세가 강했으며, 기독교 민족주의 진영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출감 후 그는 강학린 목사가 시무하는 성진 욱정교회에서 설교 부탁을 받고 장일환이 평양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한 일을 소개하며 죽음의 길인 십자가의 길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하며 평소의 신념을 토로하여 공감을 사기도 했다. 배민수가 출옥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3월 1일에 서울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후에 자진 체포되었으며 군중들의 시위가 서울에서 지방으로 점차 확대되어 간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의 항일 열정은 여전히 변치 않았다. 성진에서도 독립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강학린 목사와 상의한 후 김수영, 목정순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3월 10일 오후 5시에 그리어슨 (Robert Grierson)이 설립한 제동병원 앞에서 5,6천 여 명의 군중이 모여 시위를 하였다. 독립만세를 부르는 시위는 이튿날에도 계속되었다. 그리어슨은 일경이 아침부터 쉬고 있는 사람에게까지 닥치는 대로 도끼와 총을 휘두르며 쏘았다고 회고했다. 3명이 사살되었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날 밤에 그는 출감한지 한 달 만에 다시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배민수, 강학린 목사, 서채영은 3년 구형을 받았다. 이때도 배민수는 평화롭게 정당방위적인 시위를 했다고 주장하며 구형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그 결과 선고 공판에서 공중질서 위반죄로 1년 반으로 줄어들었다. 수감생활은 낮에는 주로 철길보수, 건축 등의 노동에 동원되었다. 밤에는 성경을 읽고, 찬송하고, 희생의 삶을 산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기뻐하는 시간을 보냈다. 같이 복역하던 한국인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그는 그들에게 사죄의 은총을 설명하며 전도도 했다. 그 기간에 그는 기독교 신앙이 더욱 돈독해졌다. 애국심도 더 깊어졌다. 일본인 간수 구사카미가 출감하면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지를 물었을 때, 배민수는 물론이라고 단호히 대답했다. 일본검찰청에서 한국인 피의자를 상대로 면담하는 자리에서도 “역사적으로 볼 때 당신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피해를 주어왔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군사정치 밑에서 배불리 먹고 의미 없이 사는 것보다는 우리의 자유를 즐기며 배고프게 지내는 것이 더 기꺼울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1920년 7월 10일에 함흥 감옥에서 출소했다. 1922년 12월, 그가 서울에 체류하고 있을 때 또 다시 체포되었다. 만주에서 일어난 폭탄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는지 의심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그 사건과 아무 연관이 없었지만 김석태라는 조선인 경찰의 지레 짐작 때문에 1주일 여 동안 구류 생활을 하며 취조를 받았다. 그는 그만큼 일경의 요주의 인물로 파악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지나는 동안 지난날의 고통을 불문하고 앞으로는 항일투쟁 노선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 것인가가 큰 과제로 다가왔다. 배민수에게 1910년대는 항일활동 초기에 해당되는 시기였다. 이때 그는 비타협적, 전투적인 방법으로 “말씀의 생활화”를 추구하며 기독교 신앙을 현장에서 표출하였다. 그것은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무력투쟁으로 민족의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절대독립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대한제국 말기의 의병 및 독립군의 무장투쟁 실천관과 일부 민족주의 계몽운동가들이 비타협적인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추구한 지사적 애국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이는 하와이에서 항일활동을 하던 박용만의 무력투쟁 방식을 모델로 한 것이기도 했다. 다른 점이라면 배민수는 미국 선교사들에게서 받은 교육과 기독교신앙, 미국유학을 계획하면서 가진 미국에 대한 호의적인 인식이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윌슨 대통령이 선언한 민족자결주의에 큰 기대심을 가지며 미국의 자유, 정의, 민주주의를 선호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V. 조만식의 계도와 복음주의 항일 노선의 형성
배민수의 무력항쟁을 통한 애국정신의 실현관은 이미 성진에서 3.1운동 때 비폭력 적이었고 1920년 출옥 후에 온건한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민족의 앞날에 대해 좌절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투쟁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운동은 계속하되 보다 현실적인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함흥 감옥을 나오기 전날 밤에 그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도록 인도해달라고 기도했다. 세계의 정세를 파악하며 독립을 달라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긴 싸움을 계획하게 되었다. 3.1 독립만세 운동 후에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만주, 중국, 시베리아, 미국에서 진행되는 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3년에는 애국지사들을 만나보고 독립운동이 전개되는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상해와 남경에 가서 4개월을 보냈다. 중국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를 참관했을 때였다. 이동휘와 함께 온 시베리아 대표들은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유럽, 미국, 중국에서 온 대표들은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서로 이념투쟁에 부심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실망하였다. 현실적으로 조국은 애국지사를 비롯하여 동포들이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데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은 분열되고 약화되는 반면, 일본은 더욱 강해지고 세계의 강국이 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장기적인 투쟁을 계획해야 하겠다고 느꼈다. 열정적인 애국심만 갖고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여겼다. 그 자신부터 실력을 쌓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1923년에 숭실전문학교 예비과정부터 입학했다. 장차 미국 유학을 갈 것을 계획하고 체계적인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학교 당국에 영어과 개설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자격 미달인 경제학 교수를 자진 사직하게 만들기도 했다. 교육을 통한 실력향상이 독립을 이룰 한 밑바탕이라고 본 것이었다. 또 하나는 사상적 동향이었다.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난 후 종교 박멸을 내세우는 사회주의 세력이 급부상하여 정신개조와 민족개조를 주도하는 기독교세력에 대항하여 반기독교운동을 벌리고 있었다. 배민수는 이러한 정세 속에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가난의 문제에는 깊은 관심을 가졌으나 기독교 복음주의와 실력양성운동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된 주요 계기의 하나는 숭실전문 재학 중에 조만식과 만난 것이었다. 고당 조만식(曺晩植)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길은 직접적인 무력, 정치투쟁보다는 경제적, 정신적 문화적 실력 양성이 앞선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당시 평양 YMCA 총무이자 오산학교 교장이었고, 김동원, 오윤선과 함께 산정현교회의 세 장로 중의 일 인이었던 자로서 (1) 기독교 상공인층, (2) YMCA와 동우구락부와 흥사단을 거점으로 하는 안창호 계열 기독교 운동세력, (3) 교육계에 기반을 둔 기독교 지식인층 등 삼자를 결집하는 위치에 있었다. 배민수에게 조만식과의 만남은 사상이나 성격까지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과거의 독립운동이 너무 기회주의적, 감정적이었고, 철저한 계획이 없이 맹목적으로 일본 경찰과 맞섰다고 자성하게 되었다. 그가 조만식과 함께 그린 더 효과적이고 긍정적인 독립운동의 새 청사진은 ‘농촌운동’이었다. 조만식을 통해 비타협적인 민족의식을 견지하면서도 간디의 무저항주의의 경우처럼 기독교 사회 복음운동이 적극적 독립운동이 된다고 확신하고 농촌 운동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현실, 빈부문제를 극복함으로써 기독교 이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그는 이 운동의 방법을 효율적으로 강구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번은 조만식을 만났다.
VI. 농촌운동과 신사참배반대
농촌운동을 통한 장기적 독립운동을 꿈꾼 그는 1928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기독교 농촌연구회’를 조직했다. 배민수를 비롯한 최문식, 유재기등 12명으로 구성했고, 조만식을 고문으로 추대했다. 나중에 박학전, 김성원이 가담 하였다. 이들은 전국 농촌에 협동조합이나 신용조합과 같은 단체를 결성하고, 농촌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며, 농민의 의식화를 추진하려고 했다. 그는 농촌개혁을 통해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될 때 민족이 독립을 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 모델은 덴마크와 스웨덴 같은 나라였다. 그는 빈민선교에도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 새롭게 도전하는 공산주의 운동에 기독교 민족운동으로 대응한다는 입장이었다. 두 부류가 일제와의 투쟁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있어서 겉으로는 별일이 없어 보였지만 앞으로는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경제적 불균형적인 문제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도전에 대해 기독교적인 해법을 찾고자 그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는 숭실대학 4년 동안에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로 생활하였다. 그런 가운데 빈민촌의 한 소녀를 도와주었으나 기생집에 팔려가고 끝내 구해내지 못했던 일을 통해 서민층의 빈곤과 무지의 문제를 실감했다. 죽어가던 5세의 어린이를 기휼병원에 소개해서 살리기도 했다. 이러한 공산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과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1930년에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에 진학하여 선교사, 목사들과 토론했으나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농촌운동의 신학적인 정립을 목표로 하여 1931년 5월에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진학한 곳은 은사 마펫(Samuel Moffett)이 졸업한 시카고의 장로회신학교(지금은 매코믹신학교)였다. 그는 신학교육 속에서 학생들과 경제문제를 비롯한 현안문제를 토론하며 기독교적 해결책을 강구했다.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려는 야망도 갖게 되었다. 즉 “ 영적 신앙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하나님 나라’ 사상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다소 폐쇄적이었던 이전의 민족주의적인 생각들을 승화시켰다. 그의 시야는 넓어졌고 민족의식도 기독교의 보편주의와 결합된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미국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1933년에 돌아온 배민수의 활동무대는 계획했던 대로 농촌이라는 낮고 가난한 곳이었다. 그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농촌부 상설총무가 되면서 농촌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34년 6월에 총회의 결의에 따라 고등농사원을 개설했을 때는 100여 명 이상이 등록하였다. 그는 농촌에 필요한 내용을 주제로 순회강연을 하였다. 1934년에만 647명의 회원이 가입하였고, 청강자가 4800여 명이나 되었다. 순회강연 및 부흥회에는 11,500여 명 참석했고, 322명의 결신자가 나왔다. 그는 농촌운동으로 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서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를 원했지만, 보다 근본적인 취지는 신앙과 정신자세를 확립시키는 데에 두고 있었다. 전국을 순회하며 여는 농촌강습회에서 농촌사업협동위원회나 YMCA의 농촌계몽 활동에는 없는 성경과목을 둔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가 펼친 농촌운동의 기본사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곧 신앙의 실천, 살아있는 신앙의 실현이 기본 목표였다. 농촌 지도자들을 교육하는 목적도 ‘십자가를 지고 희생과 봉사의 정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자’는 데에 있었다. 그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는 신학의 실천운동이었다. 또 다른 농촌운동과 구별된 점은 가난한 사람들을 의식하는 면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1930년대 후반 들어 더욱 군국주의화한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으로 기독교계는 물론 전 사회가 어수선했다. 1936년에 일제가 조선사상보호관찰령을 발포하면서 사상통제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교회 내부적으로 예장 총회는 남북이 교권 문제로 이북의 교권에 맞서 전남노회가 새로운 총회의 설립을 추진할 정도로 대립하고 있었다. 배민수의 농촌운동도 큰 난관에 부딪쳤다. 그가 농촌부 총무로 임명될 때 총회에 의연금으로 낸 6,860원의 기금이 문제시 되었다. 그 해 총회의 총 예산이 9,410원인 점을 감안하면 그것은 대단한 거금이었다. 김인서는 돈을 가지고 와서 어떤 부서를 총회 안에 설치하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비판했고, 일제는 이 자금의 출처를 흥사단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세력들은 예장 총회의 종교교육부 총무인 정인과(鄭仁果)와 농촌부 총무인 배민수를 치리하고 상설기관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대구의 남성정교회에서 회집된 1937년도의 장로회 총회는 배민수를 적극 지원했던 정인과가 ‘사고로 얼마동안 시무 못하게 되었고 고등농사학원도 개강 못하게 되었다’고 보고했다. 또한 농촌부가 미국의 보조금마저 줄어 재정적으로 곤난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는 당시 세계적인 경제 공황의 한 여파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총회는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많이 준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농촌부도 폐쇄할 것을 갑자기 결정하였다. 배민수가 관여한지 4년 만에 발생한 일이었다. 그동안 총회 안에는 농촌부의 창설과 활동을 비판하는 세력이 있어왔고, 채정민, 이정심 처럼 교회의 경건성을 강조하는 원로들도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배민수도 친구들과 스승 조만식이 모인 자리에서 ‘좋은 시기가 올 때 까지’ 농촌사업을 중단하겠다고 말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점들보다 군국주의화한 총독부가 탄압을 크게 강화하여 더 활동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었다. 일제는 농촌운동이 농민을 의식화시키고 독립사상을 고취한다고 여겼다. 그가 시작한 농촌운동은 기독교 신앙의 초월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농민이 잘 의식화되면 교회조직 자체가 일본 제국주의 체제에 정면충돌하게 되는 구조를 지닌 것이었다. 즉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초월성을 근거로 하기에 신앙심이 돈독하면 천황제 하의 일본체제에 대해 저항성을 발현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거기에다가 그 자신도 장기적인 항일운동의 한 방편으로 농민을 어떻게 의식화 할지를 염두에 두고 활동하고 있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군국주의를 더욱 강화하려 했다. 이에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으로 흥사단계 인사들이 검거되었고, YMCA의 농촌사업이 중단되었고, 예수교연합공의회가 해산되었고, 전조선 주일학교연합회가 해산되었다. 일본의 제국회의에서 국가 총동원법 통과되었고, 이른바 내선일체를 위해 한국 사람의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神社參拜)가 강요되었다. 그 강요는 교계학교에 대해서부터 시작되었다. 대다수의 장로교계 학교는 폐교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그해 9월에 열린 장로교 총회는 참배를 가결하였다. 배민수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그가 처음 반대키로 결심한 것은 1936년 금강산 수양관에서 개최된 장로교 목사 수양회에서였다. 주기철(朱基徹) 목사의 전능하신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경배 할 수 없다는 설교에 공감하였다. 이때 일경이 주목사가 설교하는 것을 연이어 경고를 하는 것을 보고 그는 박해를 예상했다. 그 후부터 배민수도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설교를 도처에서 했다. 설교 예화는 주로 초대교회 때 로마의 황제숭배를 거부하가 순교한 고대 안디옥교회의 성 로마누스(St. Romanus)였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일경의 취조를 받을 때에도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계명에 위배되므로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지 말라는 그들의 금령에 대해서도 죽어도 반기를 들겠다고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내목을 잘라 죽여도 교인들에게 나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할 것이오. 동시에 나는 내 머리를 숙여 당신들의 신사에 참배를 하지 않을 것이고 할 수도 없소(You may cut my neck but I will tell my people not to worship any other gods. At the same time, I will not and cannot bow down my head to your Shinto Shrine.”
그 후에도 그는 황해도 등지에서 계속 신사에 절하지 말라고 설교했다. 그는 신사참배 반대와 관련해서 수시로 취조를 받았고, 농우회사건(農友會事件) 때는 검거목록에도 올랐다. 이러한 국내의 여건은 그로 하여금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케 되었고 대안으로 미국에 가서 경제적인 지원을 얻어 다시 활동해야겠다고 생각게 되었다. 그는 미국 친구들에게 협조를 부탁하여 우여곡절 끝에 받은 여권으로 1938년 6월에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그가 요꼬하마를 떠난지 이틀 후에 일제의 첩자가 그를 체포하러 일본에 도착하였기에 그는 검거되지 않았으나 이 농우회사건으로 다수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체포 되었다. 측근이었던 박학전, 유재기도 검거되었다.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 주기철, 채정민, 이기선도 체포 대상이었다. 미국에 가서도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비판하였다. 특히 이기선 목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투옥된 사례를 소개하여 미국교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배민수가 미국유학에서 돌아와서 활동하던 1930년대 중반에 민족운동 진영은 이승만계의 동지회(同志會)와 안창호(安昌浩)계의 동우회(同友會)-다른 명칭으로 흥사단(興士團)-로 나뉘고 있었다. 교계 안에서도 이 양대 세력이 대결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흥사단은 정인과가, 동지회는 신흥우가 이끌고 있었다. 지역적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중심한 서북쪽에서는 흥사단이 강했고, 그들이 장로교의 교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동지회는 서울, 경기,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포진했고, 감리교의 교권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교세가 서북의 장로교는 전국 교회의 2/3를 장악했던 데 비해 동지회 쪽은 1/3에 불과했다. 배민수는 숭실전문학교 출신이었기에 자연히 흥사단계에 연계되었다. 그리고 조만식을 사랑하듯 흥사단을 창설한 안창호를 극히 존중하며 따르고 있었다. 예장 총회의 농촌부 총무로 임명될 때도 흥사단의 실력자 정인과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1938년 안창호의 사거와 군국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한 미국으로의 망명은 그가 또 다시 민족운동 노선을 변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VII. 미국 망명생활과 이승만계 노선 합류
1938년 7월 미국에 도착한 그는 매코믹신학교 동창인 커틀러(Ken Cutler) 목사의 배려로 그가 시무하는 인디아나주 개리(Gary)의 43가 장로교회에서 부목사가 되어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망명 초기인 1938년부터 41년까지 3년간은 28개 주에 있는 440여 처의 교회를 순회하며 1300여 회에 걸쳐 약 9만여 청중에게 설교와 강연을 하였다. 그 내용은 주로 일제로부터 불의한 탄압을 받는 한국의 정치상황과 기독교 박해상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때 받은 사례금을 바탕으로 “한국 선한 사마리아인회”(The Good Samaritan Project in Korea)'라는 후원회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미국인들에게 한국 기독교와 자신의 활동에 대한 지원과 협조를 부탁했다. 이 기간에도 그의 항일활동은 지속되었지만, 항일 투쟁 노선은 다시 변하였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말까지 미주에서는 이승만(李承晩)계의 동지회(同志會)와 안창호계의 국민회(國民會) 계열, 그리고 조선민족혁명당과 중한 민중동맹단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1936년에 안창호가 죽은 후에 그 위력이 다소 줄었으나, 그 규모는 여전하였다. 1941년 4월에 하와이에서 모인 “해외 한족대회”에서 민족운동 노선들의 통합이 모색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이승만은 한미협회(韓美協會)와 기독교 친한회(基督敎親韓會) 같은 외곽조직을 만들어 미국 내에서 친한 여론을 조성하고 중경(重慶)의 임시정부를 지원하게 하며 입지를 강화했다. 또한1944년에는 주미외교부 협찬회(協贊會)를 만들었다 협찬회는 1943년 12월의 카이로 선언 후에 한국의 독립이 현실적으로 가까워지자 건국준비를 위해 조직된 기구였다. 배민수는 안창호를 존경하였고 장로교의 주류 인맥인 국민회 계열에 속해 있었는데 이승만 노선에 가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어떤 경로로 이승만계와 제휴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기록에 나타난 바로는 협찬회 교육위원회의 일원으로서 이다. 그가 이승만 노선을 전환한 한 것에 대해 몇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장로교 총회에서 4년 만에 해임된 일이나 정인과와의 관계에 큰 상처가 생긴 일이 한 계기로 작용했으리라는 점이다. 현실적 요건으로 그가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던 그의 처지도 무시할 수 없는 한 요인이다.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미국 중심의 세계 인식이 강화되었고, 그의 사상적 동향은 기독교를 존중하고 반소 반공을 내세우는 미국과 일치하고 있었다. 그의 미국관은 ‘민주주의와 자유와 정의와 종교의 중심’이 되는 나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망명생활은 그가 가지고 있던 민주주의, 자유주의, 반공, 빈민구제사상의 틀을 재확인하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공산주의는 전체주의나 파시즘과 다를 바 없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그가 염원하는 조국의 독립과 기독교 왕국의 건설을 가장 크게 도와줄 곳은 미국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기독교 중심의 새 나라의 건설을 실현할 지도자에 가장 근접한 인물은 반소(反蘇) 및 반공의 국가 건설 노선을 확고히 한 이승만이라고 여겼다. 존경하던 안창호는 타계했고, 그를 대신할 인물로 여길 자는 이미 교회세력을 확보한 이승만밖에 없었다. 배민수가 미국에서 기반이 거의 없었던 점도 이승만계와 합류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민족운동가들 사이에서 좌우합작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미국 정부가 소련에 대해 유화정책을 펼친 것에도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점 또한 이승만 노선으로 기우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한 가지 이유를 더 고려 할 수있는 근거는 그가 1941년부터 이승만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맨하탄 감리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1945년 초에 과거 기독교 농촌연구회 회원이었던 김준성을 이어 그 교회의 6대 담임 목회자로 청빙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배민수는 10대 소년시절에 고향인 청주에서 이승만 박사의 연설을 듣고 생의 진로를 정한바 있었다. 그는 장년이 되어 미국에서 다시 이승만을 만났고, 그 일은 그에게 소싯적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새 기회가 되었다. 그 와중에서도 프린스턴 대학과 신학교에서 학문적 지평을 넓히는 일에도 노력하였다. 1943년에 일본의 펄 하버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본의 우편물과 비밀문서를 취급하는 미국무성 검열반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영어와 일본어를 잘 구사 할 수 있었던 그는 이 기회에 재미. 재중, 민족운동의 동향이나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문서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국제 정치적인 안목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망명지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 박사와 더불어 장차 해방을 맞을 새 나라의 건설을 위해 정부기구의 조직을 필두로 제반 준비 작업을 도왔다. 그러는 한편으로 그가 할 수 있는 항일운동을 지속하였다.
나가는 말
배민수 목사는 당시의 사회정세나 사상동향 속에서 사회복음주의자들과 일부 실천적인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복음주의 입장에서 활동했고, 기독교 사회주의와는 다른 유형의 실천방법을 모색했다. 그의 항일운동은 지금까지의 연구나 증언에서 드러났듯이 농촌운동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생활화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받은 교육수준과 여러 여건에서 그는 사회적으로 높고 화려한 길을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을 택했고 농촌을 봉사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런 모습으로 그는 오늘날 물질만능과 이기심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었다. 경천애국(敬天愛國)의 삶을 모범으로 보여주었다. 부친으로부터 기독교 신앙과 애국심을 유산으로 받아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삶을 살고 갔다. 원초적으로 형성된 그의 항일 의식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한 직후부터 조선국민회를 통해 저항하면서 옥고를 치렀고 민족운동의 최고봉인 3.1운동 때도 선두에서 참여하여 투옥되었다. 장기간의 식민지정책에 맞서 거개가 농민이었던 당시 농촌운동으로 그 방법을 바꾸어서 항일활동을 계속했다. 일제의 마지막 민족말살 정책의 하나였던 신사참배에도 반대하여 성직자로서 그리고 민족운동가로서의 지조를 지켰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그의 항일투쟁의 방법과 노선은 원초적인데서 박용만, 조만식-안창호, 그리고 이승만 라인으로 달라졌지만, 일제말기에 민족운동 지도자들 마져도 대부분 변절하던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굴복하거나 변절하지 않고 일관되게 항일활동을 하였다. 한국전쟁 때에는 미국 생활을 포기하고 전화에 싸인 조국에 구호품을 들고 돌아와서 처음에 가졌던 농촌을 위해 금융조합장이 되어 식산(殖産)계를 만들고 농민 잡지를 발행하며 농민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의 사후 가족들은 그의 유지를 받들어 남긴 재산인 약 5만 6천평에 달하는 일산의 땅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하였다. 한 사회나 단체 그리고 국가나 민족이 역동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하려면 전통(傳統)의 계승(繼承)과 전통(傳統)의 창조(創造)가 잘 지속 될 때이다. 끈어야할 전통은 단절하고 좋은 전통은 계승해 나가고 아울러 새로운 전통의 창조가 이뤄져야 한다. 연세대학교가 배민수 기념강좌를 하는 뜻이 그의 유지를 재음미하고 알리고 실현하는 것이라면 연세인의 할 일은 무엇인가? 그의 초지일관(初志一貫)한 항일 정신은 물론이지만 배민수보다 훨씬 많은 재산을 가진 연세대학교 동문이나 관계자들이 많은데도 다른 대학 출신이 최고 최대의 기증을 했다는 점은 연세인 모두가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주제어: 배민수, 독립운동, 농촌운동, 조선국민회, 정인과, 조만식, 박용만, 안창호, 이승만, 신사참배, 숭실학교 Pai Minsoo, Independent Movement, Rural Movement, Korean National Association, Jeong Ingwa, Jo Mansik, Bak Yongman, An Changho, Syngman Rhee, Shinto Shrine Worship, Sungsil Academy (Union Christian Col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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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 Minsoo, Who Sha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Mimeograph) <저작권자 ⓒ 최재건의 역사탐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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