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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전파자;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I have a dream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1/11 [23:04]

꿈의 전파자;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I have a dream

최재건 | 입력 : 2021/01/11 [23:04]

꿈을 전파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목사

 

영어연설문] " I Have a Dream(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 Martin Luther King, JR.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번역, 해석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1929115~ 196844)목사는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라는 말을 연상 할 정도로 꿈을 가진 민권운동가였다. 그는 미국의 고질 적인 인종 차별, 흑백차별 철폐를 위해 한평생 비폭력적 방법(5:39, 44)으로 투쟁한 흑인 목회자였다.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도 동참하였다. 그의 꿈대로 흑인과 백인이 함께 어울려 사는 꿈을 이룬 사람이 되었다. 그 꿈의 실현을 위해 그는 자기의 목숨도 받쳤다.

 

1. 성장기

 

마틴 루터 킹은 1929115일 미국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문은 남부에 강한 교세를 갖고 있는 침례교의 목회자 집안이었다. 그의 아버지 마이클도 침례교목사, 할아버지 제임스 킹 역시 침례교회 목사였다. 외가 쪽으로도 친척 중에 목회자들이 있었다.

 

1930년대의 어느 날 그의 부친이 그의 아들 마틴을 데리고 도심에 있는 구둣가게에 데리고 갔다. 그들에게 점원이 말했다. “저 뒤에 있는 의자에 가서 조금 기다려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그의 부친은 여기 있는 의자들은 불편함이 없습니다. 대단히 편안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점원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리로 옮겨주셔야만 합니다. 앉아서 구두를 사든지 아니면 …….”

 

아무 것도 안 살 것입니다.” 부자는 당당하게 가게를 나왔다. “나는 얼마나 이런 제도 아래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마틴 루터 킹의 아버지는 으르렁거리는 투로 말했다. 킹은 후에 자기 아버지가 그토록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이런 차별은 어느 곳에서나 행해지고 있었다. 식당, 화장실, 교통시설, 정거장, 공중보건소는 공공연히 흑인용 백인용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는 흑인으로 태어나 편견빈곤속에 수모로 점철된 삶을 어려서부터 의식하며 살았다. 킹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아버지가 길 건너편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찾아가서 같이 놀자고 해도 응하지 않았다. 친구의 어머니는 킹을 정중하게 대하면서도 늘 무슨 이유를 붙여 그냥 돌려보냈다.

 

마침내 마틴 루터 킹의 어머니가 바른 이유를 이야기해주었다. “그 애들은 백인이야. 너는 흑인이고.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같이 놀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란다.” 킹은 그 같은 기성 제도에 불만이었지만 순응하며 지냈다. 버스를 탈 때면 흑인 칸으로 갔고, 흑인교회에 다녔으며, 백인과 분리된 학교에 다녔다. 영화관에서도 흑인석에 앉아서 영화를 보았다.

 

그는 가난에 직면하여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930년대의 경제 공황기에는 각 가정의 가장들이 빵을 사기 위해 몇 시간이고 줄을 서곤 했다. 이 무렵 아틀랜타에는 65%의 흑인들이 구호 대상이었다. 그러나 마틴은 비교적 재정적으로 안정된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또한 목사의 아들이었기에, 주일학교, 청년회, 수련회 활동에 참여하는 등, 성장기에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모어하우스(Morehouse)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948년에는 크로저(Crozer)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훗날 그는 그곳에서 교수들과 책들, 그리고 많은 사상을 접했다고 회고하였다. 그 한 예로, “자유에로의 흐름”(Stride Toward Freedom)이란 자서전에서는 자신이 한때 사회복음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도 했었다고 술회하였다.

 

그는 1955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보스톤 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신학과 윤리적인 성향에 필요한 기반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폴 틸리히와 헨리 넬슨 위먼의 하나님 사상의 개념에 관한 비교”(A Comparison of the conceptions of God in the thinking of Paul Tillich and Henry Nelson Wieman)이었다. 그에게 하나님은 인격적인 실재요 활동적인 분이시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사회진보를 추구한 라우센부시나 이성의 독자적 힘을 추구한 위먼의 사상보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만이 필수적인 것이었다. 박사과정 중에 그는 보스톤의 뉴잉글랜드 음악학교에 수학 중이던 코레타 스캇(Corretra Scott)을 만났다. 1953년에 그녀와 결혼했고, 슬하에 4자녀를 두었다.

 

보스톤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이 끝났을 때 그는 이미 두 교회와 세 곳의 대학에서 청빙을 받고 있었다. 그 중 알라바마주의 몽고메리에 있는 작은 덱스터 애비뉴 침례교회를 선택하였다. 목회자로서 그는 설교를 준비할 때 마틴 루터 킹은 뒤에 서고 하나님이 앞장 서시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너는 복음의 통로이지 근원은 아닌 것을 명심하라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그의 설교는 교인들이 잘 받아들였다.

 

1954년부터는 교회 외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시무하던 중인 1954년 몽고메리 지역주민의 년평균 수입은 백인이 $1,730이었다. 92%의 백인이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는데 반해 흑인 주택의 2/3은 그렇지 못했다. 각급학교와 일반 교통수단과 공공장소는 흑인용과 백인용이 분리되어 있었다. 몽고메리 지역의 투표적령 흑인은 30,000이었으나 등록한 흑인은 단 2,000명뿐이었다. 킹은 그 지역 흑인 목회자 연합회에 가입도 하고 전국 연합회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한 예가 1954년 대법원의 학교 통합을 위한 역사적 결정에 참여한 것이었다. 그는 담임목사직도 열심히 봉사하였다. 설교준비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환자심방과 가정심방도 열심히 하였다. 특히 교회 부서들 중에 교육과 사회활동 분야에 치중하는 목회를 하였다.

 

2.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

 

인종차별 철폐문제는 사소한 사건에서 발단되었다. 19551일 로사 팍이란 한 부인이 퇴근 길에 지쳐서 버스의 맨 앞쪽 백인석에 앉았다. 그 후 백인석이 차서 나중에 탄 백인이 앉을 수 없게 되자 운전기사는 그녀에게 일어나라고 했다. 그녀는 거절하였고 끝내는 체포되었다.

 

E. D. 닉슨은 당시 전국 NAACP의 지도자였는데, 그녀의 보석금을 지불하였다. 그 때 어떤 영향력 있는 부인이 닉슨에게 킹으로 하여금 버스 보이콧 운동의 선봉장 역할을 하도록 제의하게 하였고 킹은 동의하였다. 킹은 그가 시무하는 교회를 비밀 모임의 장소로 제공하였다. 40여 명의 목회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승차거부운동을 벌리기로 하고 125일 월요일 저녁 대규모 집회의 광고를 위해 7천여 매의 승차거부란 전단을 붙였다. 한 여자는 그 전단을 받고 무슨 내용인지를 몰라 한 백인여자에게 읽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백인 여자는 이 사실을 신문사에 알렸고, 그 덕택에 홍보가 더 잘 이루어지게 되었다. 1955125일 월요일 킹의 부인 코레타가 나가보니 버스들은 빈 채로 달리고 있었다. 다만 한 버스에 백인 2명이 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여 보이콧 운동은 시작되었다.

 

이 일은 한 해 동안 지속되었고, 마침내 몽고메리의 공공교통 수단은 흑백석이 혼합되었다. 그 날 오후 킹은 몽고메리 시의 개발 위원회 회장으로 피선되었고, 대규모 집회의 연사로 초빙되었다. 그는 그날 20여 분 준비를 하였고 공정하게 연설할 수 있도록 기도도 하였다. 이날 밤 그의 연설은 한 시민운동가로서 그의 행동하는 신앙, 사랑, 비폭력저항의 개념을 천명한 것이었다.

 

3. 비폭력투쟁

 

교회와 교인의 사회참여문제에 관하여, 라우센부시는 개인적인 경건한 신앙생활과 사회정의참여는 동시에 추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학자였다. 킹은 처음에는 그러한 라우센부시의 신학적 입장에 섰으나,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에 대해 기독교의 사랑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고심했다. 기독교의 사랑의 교리에 확신을 가진 그는 결국 양쪽 모두에게 균형 된 적용을 하기로 하였다. 구체적 투쟁의 방법으로는 비폭력 투쟁의 길을 선택했다.

 

이 비폭력투쟁사상은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와 힌두교의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에 힘입었다. 그는 인도를 방문하고 그의 사상에 대해 연구도 하였다. 간디가 말한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는 일반적으로 수동적 저항으로 번역된다. 킹은 이를 진리의 힘 사랑의 힘으로 인식하였다. 자유를 위한 억압당하는 자들의 투쟁에는 비폭력 저항이 가장 강력한 무기하는 것을 확신했다. 사실 간디의 사상은 힌두교 뿐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간디는 예수의 산상보훈을 읽고 원수를 사랑하라”,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에 감동하였다.

 

킹 목사에게 산상보훈은 수동적 저항의 교리라기보다는 몽고메리 흑인들의 사회적 활동에 힘을 실어주고 영감을 주는 근본적인 사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킹 목사가 사랑이란 창조적 무기로 투쟁하고 항거할 수 있게 일깨운 것은 나사렛 예수였다. 킹 목사는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는 흑인들에게 투쟁하는 동기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간디는 기교를 가르쳐주었다라고 말했다.

 

그가 조직하고 보이콧한 여러 일들은 여기에서 다 거론할 수 없다. 그는 흑인택시회사의 조직, 흑인의 카풀(car pools)제도, 협상을 위한 노력, 법정투쟁, 야간성토와 같은 일에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적극 가담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그리 큰 것들이 아니었다. 몽고메리의 투쟁도 흑인이 뒤에서 자리를 채워오고 백인은 앞에서 채워오고 중간좌석은 필요한 사람부터 앉자고 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요구에 대한 반대는 완강하였다. 시의회와 버스회사는 처음부터 거절 성명을 냈다. 그들은 검둥이들이 자신들의 결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보이콧이 점점 감소하리라고 생각했다. 당국은 노령의 흑인 목회자들에게 교회의 사명은 영혼구원에 있지 사회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사주하기도 하였다. 킹은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시지만 아니오할 것은 아니라고 하도록 가르치신 주이신 것을 그들이 무시한다고 대응하였다.

 

이에 대해 자유행동을 제지하는 방법도 거칠어져 갔다. 유언비어와 편지와 전화로 킹목사의 생명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킹은 그 자신이 만일 죽는다고 해도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끝까지 비폭력을 천명하였다. 그 즈음 어느 저녁에 전화를 받았다. “야 깜둥이, 우리는 너에 관한 모든 정보를 갖고 있다. 다음 주가 오기 전에 너는 몽고메리에 온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라는 소리가 들렸다. 킹목사는 퍽 인간적이었다. 그는 무서워서 그날 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침내 기도하기를 제가 믿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고 여기 섰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두렵습니다. 민중들은 제게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힘과 용기 없이 선다고 하면 그들은 방황할 것입니다. 저는 이제 힘이 다해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킹은 후에 이 때를 회상하여, “나는 전에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고, ‘진리와 의를 위해 일어서라, 하나님이 항상 너와 함께 하시리라고 말씀하시는 확신을 가졌다고 하였다.

 

1956130일 승차거부 운동을 펼치기 시작한지 두 달이 못되어 킹의 집 앞에 폭탄이 터졌다. 이후로도 수십 차례에 걸쳐 그의 생명을 노린 위협이 있었다. 시의회는 사이비 법적용으로 이 반대운동을 제지하려고 하였다. 킹을 비롯한 흑인 운전자들은 교통법규 위반으로 걸리기도 했다. 카풀은 불법으로 금지되었다. KKK(Ku Klux Klan)단은 흑인들에게 항복하라고 위협했다. 두 번째 폭탄이 킹의 집 앞에 떨어졌으나 폭발하지 않았다. 이것은 두 명의 백인이 기도했던 것이었다. 범인은 체포되지 않고 오히려 킹목사가 체포되어 버스승차거부운동의 주동으로 $500의 벌금을 내라는 판결을 받았다. 다른 수백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백인 목회자들은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킹은 계속 비폭력을 주제로 하여 설교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러면서 계속 버스를 타지 말라고 외쳤다.

 

19561113일 버스승차거부운동을 벌인지 11개월이 되었을 때 몽고메리 법정은 재판을 속개하였다. 연방 법원은 몽고메리지역 버스분리법은 비헌법적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1221일 킹과 그의 백인친구들은 함께 몽고메리의 버스를 타고 기뻐했다. 그간 10대의 흑인소녀가 4명의 백인소년들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3교회와 한 목회자 사택이 폭발하였으며, 밤에는 버스가 다니지도 않았다. 이런 과정 끝에 마침내 흑인은 승리했다. 몽고메리 지역의 버스는 다시 정상운행하기 시작했다.

 

1960년 그는 고향인 애틀랜타로 돌아와 그의 부친이 담임했던 에벤에셀 교회 담임목회자가 되었다. 대외적인으로는 남부의 기독교 지도자 협의회 활동과 인권운동에 진력했다. 이해 10월말 그는 애틀랜타의 한 식당에서 인종차별을 항의하는 33명의 청년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때 벌금형을 받았으나 그 전에 있었던 교통위반에 대한 집행유예 기간을 어겼다고 주립감옥에 수감되었다. 이에 대해 흑인들이 거칠게 항의했다. 당시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중재는 실패했고, 민주당 대통령후보였던 존 에프 케네디의 중재로 그는 석방되었다. 이 일은 케네디가 박빙의 승리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 후 공공 시설물에 대한 차별정책 폐지를 촉구하기 위한 그의 연좌, 항의행진 활동은 흑인들 뿐 아니라 행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백인 자유주의자들에게서도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킹목사의 인권투쟁에 도움이 된 것은 TV를 비롯한 매스컴의 보도였다. 수십년 전 라우센부시 때는 상상도 못한 유익한 매체였다. 그 가장 성공적인 사례가 1963년 버밍햄 사건의 보도였다. 당시 버밍햄에서 알라바마 주지사로 당선된 자는 조지 월레이스(George Wallace)라는 흑백분리주의자의 대표격 인물이었다. 이 지역의 흑인 밀접지역은 다이나마이트 언덕이라고 불릴 정도로 폭탄이 자주 터졌다. 킹목사는 버밍햄에서 공중화장실, 수도의 분리 실태에 반대하는 모임에 초빙되었다. 그는 196342일 버밍햄에 도착하여 그곳 지도자들과 하께 일을 진행시켰다.

 

처음에는 다소 부진했으나 곧 많은 호응을 얻게 되자 10여 일 만에 500여 명의 흑인이 체포되었고, 하루에 300명이 투옥되기도 하였다. 어린이들도 맨 발로 시위에 참여하였는데, 인종차별 종식을 위한 이 집회에 경찰들은 개를 풀고 소방호수로 물을 쏘아대며 방해하였다. 한 신문에서는 일 면 머리기사로 창녀가 경찰견에 끌려가는 장면을 보도했다. 이 장면은 전 미국 시민들이 관심을 갖게 하였다. 곧이어 킹목사와 900여 명의 어린이와 젊은이가 체포되었다. 그들은 오직 자유만 외쳤다. 1963563,000여명의 흑인들이 투옥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날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그의 행동에 반대하는 동료들도 있었다. 킹목사는 누구도 면회가 금지된 상황 아래 있었을 때인 412일 성금요일에 버밍햄 옥중서신을 발표했다. 흑인 동료성직자들과 교회를 향하여 비폭력투쟁을 역설했다. 마침내 19635125개의 사업기구들이 흑인요청을 들어서 분리정책을 철회하고 일자리를 주었다. 대통령도 기자회견에서 버밍햄 선언과 투쟁에 경의를 표하여 흑인과 킹목사는 승리를 얻었다.

 

4. 설교에서의 도전

 

그는 평화적인 변화를 위해 뜻을 같이 하는 세력들을 규합하고 시위에 동참시켰다. 아브라함 링컨이 흑인노예해방 선언을 한지 100주년이 되는 1963823일 워싱턴에는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한 평화대행진이 있었다. 이 모임의 목적은 인종문제해결의 중요성을 미국시민과 세계에 알리는 데에 있었다. 이 모임에서 목사는 그의 대표적 명연설로서 두고 두고 기억되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하였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모든 계곡이 낮아지고, 거친 곳은 평평해지고, 굽은 곳은 곧아지고, 주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고 모두 함께 보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이 나라의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들과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이 연설은 전 세계에 알려져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백인들도, 지성인들도 동조했다.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결속시켰다. 인권운동도 계속 확장되어갔다.

 

킹목사의 캠페인이 모두 승리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639월 버밍햄 주일학교의 4명의 어린 소녀가 백인들에 의해 폭사되었다. 그들의 장례식에서 킹목사는 여전히 비폭력 투쟁을 선언하였다. 그는 1963년 타임 선정 올해의 인물에 지정되기도 했다. 1964년 초 예일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가톨릭 인종협력회의로부터 존 F.케네디 상을 수상받았다. 그 결과 1964시민권리법안이 통과되었다. 고용문제와 공공시설물에서 흑백 차별행위는 불법화되었다. 이해 12월에 킹목사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여기에서도 그는 인종불평등 투쟁으로 우리가 더 좋은 나라를, 더 좋은 백성을, 더 고상한 문명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남녀 모두가 알게 되고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꿈을 피력했다.

19641014일에 35세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5. 셀마에서의 도전

 

정의는 비폭력으로도 반드시 이긴다는 것이 킹목사의 행동철학이었다. 차별정책 폐지운동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흑인들을 모두 투표에 참여하도록 유도해서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의회와 대통령을 인준 서명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첫 실험 무대가 알라바마주의 셀마였다. 1965년 셀마가 속한 달라스 카운티는 1,500여 명의 흑인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333명이 투표등록을 했을 뿐이었다. 물론 공공연한 반대와 음모가 횡행했다. 드디어 196535일 셀마의 대행진이 진행되었고, 주지자 월레이스 휘하의 경찰과 병력의 저지에 부닥쳤다. 이때 킹목사는 기도하라고 하고 본인은 퇴장했다.

그 행진은 선한 목자상이 새겨진 교회 유리창을 들이받은 자를 비롯해 70여 명이 입원하고 90여 명이 부상하는 사태로 끝났다. 킹목사는 다시 행진을 계획하고 목회자들을 규합하였다. 흑인교회는 물론이고 백인교회 지도자들도 참여하도록 하여 대 호응을 얻었다. 보스톤의 유니테리언 교회의 제임스 리브(James Reeb) 목사는 여기 동참했다가 살해되기도 하였다. 이 일 후 매스컴은 대통령 존슨은 킹목사의 이상을 인정하는 것을 천명할 것, 의회는 투표권법안을 통과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의 연설제목은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는 시위대가 늘 부르던 노래가사였다. 마침내 19658월 킹목사는 존슨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는 장면을 뒤편에서 지켜보며 승리의 감격을 만끽했다.

 

6. 베트남 전쟁과 그의 최후

 

킹 목사를 곧잘 곤경에 빠뜨리게 한 것은 그의 비폭력 투쟁 방식이었다. 흑인 이슬람교도들은 폭력투쟁을 요구하였다. 시카고에서 있었던 주택문제 인종차별 반대시위에서는 시당국자와 협정을 맺었으나 실효를 보지 못하자 비폭력 투쟁방식의 한계 때문인 것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그의 비폭력 투쟁 방법은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실패와 비난과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비폭력 투쟁방침을 바꾸지 않고, 오히려 투쟁 범위를 확대해나갔다.

 

월남전 반대와 집회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베트남인들의 운명은 베트남인들에게 맡겨야 된다. 미국의 개입은 부당하고, 죄없는 미국 청년들의 피를 헛되이 쏟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베트남 전쟁을 무의미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반전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196744일 그는 뉴욕의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반 베트남 전 연설을 한 후 뉴욕시 평화대회에 참가했다. 베트남 전쟁은 무익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의 베트남 전쟁을 다음과 같이 논박하였다.

 

지금 미국 청년들이 아시아의 정글에서 전투를 하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너무나 막연하기 때문에 전국의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흔히들 이들의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이공 정권과 그의 동맹세력도 명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으며, 미국 흑인병사들은 민주주의를 누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일은 그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투쟁범위와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인권문제 뿐만 아니라 빈곤과 실업과 같은 경제문제에로 관심을 넓혀갔다. 청소부, 병원노동자, 계절노동자, 아팔래치안 산맥의 빈민, 과격한 학생 지식인 등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미국이 두 전쟁을 치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월남전이 속히 종식되어야 가난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존슨 대통령도 한 때는 킹목사의 이 안에 동조하기도 했다.

 

그는 빈민 문제 해결을 위해 워싱턴 대행진 계획을 세웠다. 1968년 봄에는 테니시주 위생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멤피스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44, 숙소로레인 모텔의 발코니에서 한 저격범에 의해 생애를 마감했다. 39세의 젊은 청년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통령 린든 B. 존슨은 킹 목사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선포하였다.

 

1969년 저격자 레이(James Earl Ray)는 살인죄로 99년 형을 언도받았다. (1998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킹 목사는 그의 비폭력 투쟁을 통한 미국 인종문제 해결 노력은 그의 생일인 115일을 1986년부터 미국의 국경일로 제정하게 하게 만들었다. 그의 생일에 가까운 매년 1월 세 번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의 날로 정하고 연방정부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흑인노예해방을 실현시켰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도 갖지 못한 영광이었다. 킹 목사는 남부지방 출신 흑인으로서 백인들의 양심에 호소하고 또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력을 규합함으로써 마침내 소원인 그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의 사후 42개 주에 900여개 이상이 그의 이름을 붙인 거리가 생겨났다. 미국 25개처에 기념관 과 박물관도 세워졌다.

 

7. 킹목사의 사상

 

킹목사는 설교자요 조직가요 민권운동가였다. 보스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도 받았지만 학자의 길을 가지 않았다. 학문적 업적을 쌓기 전에 행동하는 양심의 소유자로 살았다. 그래서 그의 사상을 요약할만한 조직신학적인 자료는 없다. 그가 남긴 설교, 시위 때의 연설 등을 통해서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보다 면밀한 분석과 고찰을 기대 할 뿐이다.

 

1) 성장기에는 보수적 복음주의 신앙의 소유자였으나 장성해서는 사회복음을 믿었다. 마 지못해 참여하는 흑인 목회자들을 향해 참된 종교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뿐 만 이 아니고 인간과 인간 각각의 바른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2) 그는 비폭력사랑을 확신했다.

3) 교회와 그 책임을 믿었다. 백인교회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4) 구약시대의 예언자처럼 전통적 예언자로서 사명을 다했다.

5) 모든 인간은 한 형제라는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 사상에 공감론자였다. 인종차 별, 흑백 차별에 적극 반대한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이 민권 운동의 바탕이었다. 비폭 력 저항과 인종차별 철폐 운동 외에도 근대 약소국의 식민지 해방 운동에도 관심을 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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