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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 테일러 선교사

중국선교의 대부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1/22 [01:38]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

중국선교의 대부

최재건 | 입력 : 2021/01/22 [01:38]

                                  중국 개신교선교의 대부: 허드슨 테일러

 

 

 

허다한 증인들 - 중국의 은인 - 허드슨 테일러허드슨 테일러(Hudson J. Taylor, 載德生, 1832-1905)선교사는 근대선교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다. 중국 개신교 선교의 개척자요,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의 창시자였다. ‘만일 내게 천개의 목숨이 있다면 단 하나도 남김없이 중국을 위해 받칠 것이다라는 그가 중국 선교에 대해 명언을 남겼다.

 

그는 영국 요크의 반스리(Barnsley)에서 태어나 중국의 장사(長沙)에서 죽기 까지 중국선교사로서 51년간 헌신, 봉사했다. 의사였지만 의료 활동보다 기도와 굳건한 믿음으로 내륙 지역 복음전파에 큰 역사가 일어났다.

 

테일러는 영국 시골 감리교 평신도 설교자의 아들로 자라나면서 17살 때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The finished work of Christ)” 이란 전도지를 읽고 중생의 체험을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나아가 팔리(Peter Parley)중국과 중국인”(China 7the Chinese)이란 서책을 읽고 중국의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49년에 그는 하나님의 언약에 감격하여 한평생 중국 복음화에 대한 헌신키로 결단하였다.

 

 

선교사의 길을 가기 위해생활을 간소화했다. 가지고 있던 편리한 물건들을 필요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런던의 왕립 런던병원에서 의학공부를 하면서 중국복음전도협회에도 가입했다. 18533월 중국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이 서구에 잘못 알려져 중국에 곧 기독교 왕조가 건국되리라고 여기게 되어 테일러도 서둘러 중국복음전도협회의 파송으로 18539월에 중국선교사의 장도에 올랐다. 당시만 해도 선교의 길을 떠나면 사별하는 경우가 빈번하였음으로 그 어머니가 테일러는 승선하는 테일러를 보고 너무 서글피 울어 그 울음소리를 평생 잊지 못했다.

 

18543월에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홍건적의 난으로 난방도 안 되어 손발이 얼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난리가 자주 일어나 생명의 위협이 상존했다. 한번은 옆집에서 불이나 죽을 번했을 때 비가 내려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후에 그는 이때를 회상하며 당시 겪은 추위 굶주림, 위험 속에서 지새운 밤들, 심지어 고독의 절망감등이 모두 하나님의 적절하고도 세심한 배려 속에서 일어난 것으로 깨닫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고백하였다. 그 와중에서도 1854년에만도 상하이에서 지앙수성, 저장성 18번이나 오가는 선교 활동을 펼쳤다. 얼굴은 타고 작은 물집들이 생기고 늘 걸어 다니니까 발은 언제나 아팠고 피로는 누적되어 갔다.

 

1857529일 그의 생일부터는 런던 선교회에서 떠나 독립선교를 시작했다. “야웨이레”(야웨께서 준비하신다), “에벤에셀”(야웨께서 여기 가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말씀을 사무실에 써서 붙이고,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고 선교 현장에 나갔다.

 

닝보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중에 선교사 자녀였던 마리아를 만나 결혼하였다. 1860년에 건강의 악화로 안식년을 맞아 런던으로 돌아와 체류하면서도 중국어로 성경의 번역과 중국에 관한 저술을 했다. 그의 선교 비전을 그가 구술하고 부인 마리아가 기술한 중국: 그 영적 필요와 호소”(China: Its Spiritual Need and Claims)는 중국인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중단했던 의학 공부도하여 외과와 산부인과면호도 취득했다. 또한 이 기간 중에 당대의 설교가 스펄존 목사와 친교도 갖게 되어 테일러의 선교사역에 평생후원자가 되었다.

 

중국으로 돌아온 테일러는 중국에 온 선교사들이 항구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고 매월 100만 명 이상의 중국의 내지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고 죽어가는 것을 너무 가슴 아프게 느꼈다. 마침내 그는 중국 내지 선교를 목표로 하고 1865년에 중국내지 선교회를 조직했다.

중국내지 선교회는 초 교파적으로 운영되었고 뜻을 같이한 선교사들은 다국적이고, 노동자들과 독신녀도 받아들였다. 모금을 권유하지 않고, 빚지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만을 바랐다. 재정문제에서 공동체적 믿음의 삶을 살았다. 아편 거래를 반대하며 복음을 전한결과 800여명의 선교사들이 125개의 학교를 세웠고 18.000여명이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드렸다.

 

 

특정 선교회나 교단의 선교비를 지원 받지 안했지만 오직 기도하여 모여진 그의 선교를 돕는 기부금도 1471천 파운드나 되었다. 테일러는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중국인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머리도 체두변발식으로 했다. 그는 의사로 의료 선교 분야에서도 활동하였지만 언어적 재능도 있어 성경연구를 위한 희랍어, 히브리어, 라틴어는 물론 중국어도 만다린을 필두로 여러 지방어로 설교 할 수 있었고 성경도 여러 중국 지방어로 번역하였다.

 

테일러는 그의 아내와 4자녀를 잃고도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 사건 때는 내지 선교회 회원만도 58명의 선교사와 21명의 그 자녀들이 목숨을 잃는 비극도 있었다. 중국 정부가 보상하려고 했지만 테일러는 그 보상도 사양하였다. 선교는 계속했다. 사후 중국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는 19세기에 가장 뜻있는 일을 펼친 유럽인으로 알려졌다. 1914년에는 중국 내지 선교회는 세계최대의 선교회가 되었다.

 

교회역사가 터커(Ruth Tucker)는 사도 바울 이래 19세기 까지 테일러만큼 큰 비전과 조직적이고도 넓은 지역에서 선교한 이는 없었다고 했다. 선교신학자 구스타브 바르넥 교수는 성령과 신앙으로 충만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겼으며, 대단한 자기 부인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가슴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연민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보기 드문 기도의 용사였고, 놀라운 조직능력이 있었으며, 철저하게 솔선수범하는 인물이었고, 지칠 줄 모르는 끈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놀랄 만한 영향력을 주는 인물이었으며, 아울러 어린아이 같은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였다라고 했다.

 

중국내지 선교회는 오늘날 OMF (Oversees Missionary Fellowship)으로 개명되어 계속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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