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슨과 이승만의 일제말 임시정부 승인운동기독교인 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에비슨과 이승만의 일제 말 임시정부 승인운동 - 기독교인 친한회 ( 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 독립 운동 후 4월에 상해를 비롯한 8개 처에서 세워졌다. 산재한 여러 임정보다는 하나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당위성에 따라 그해 9월 11일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의 상해에 형성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본래의 소임과 염원에 미치지는 못했다.
임정은 그 출발 때부터 평탄치 못했다. 레닌의 볼세베키 혁명정신을 추종하는 세력과 자유 만주주의 세력이 처음부터 대립되어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초대 대통령에 선임된 이승만도 이동휘, 신채호 등을 비롯하여 임시정부와의 관계도 처음부터 원만하지 못했다. 마침내 탄핵도 당했다.
이승만은 주로 미주에 머물면서 그의 주창대로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에 주력 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전쟁에 참여한 강대국들로부터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는 것이 전후에 독립 국가로서 승인받는 데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이승만은 기독교인들을 통해서 미국 정계, 특히 의회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미국 사회에서 한국을 아는 유일한 집단이 기독교란 점을 알고 있었다. 선교사 파송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한국 선교에서 1934년 은퇴한 뒤에 미국에 거주하던 에비슨(Oliver R. Avison)을 1942년 가을에 워싱톤에서 만났다. 에비슨이 이승만을 처음 만난 것은 이승만이 19세 때였다. 영어와 한국어를 서로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서였다. 에비슨은 이승만의 상투도 짤라 준 사이였다. 그는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지지하고 이승만과의 혁명을 논하던 젊은 날의 우의를 한평생 이어 갔다.
에비슨은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의 교수였다. 언더우드의 설득으로 안정된 그 자리를 버리고 선교사로 1893년 내한하였다. 제중원을 맡아 미국 북장로교선교부 단독으로 경영하도록 체제 개혁을 했다. 보잘 것 없던 병원과 의학교육을 수준 향상과 시설의 확장도 했다. 1900년 뉴욕의 에큐메니칼 선교대회에서 호소하여 세브란스의 호응을 통해서였다. 연희전문과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의 교장직을 18년간이나 겸직했었다.
1942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연합국의 승리가 예견될 때였다. 이승만은 에비슨을 만나 기독교인친한회를 조직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의기투합하여 만든 단체였다.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서 이승만은 이미 한미협회를 만들어 임시정부를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승인을 받고자 하였다. 그 것이 의도대로 되지 않자 ‘기독교인친한회’를 또 조직하게 되었다. 미국 내에 주한 선교사 경력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독립을 찬성하는 이들 위주로 하였다.
에비슨은 전쟁 후 선교사들이 다시 한국에서 활동하기를 원한다면 이승만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일본과 싸워야 하며, 임시정부 승인운동에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승만은 에비슨, 핏치등 친한 인사들을 통하여 미국 내의 기독교인들에게 “아시아에서의 기독교문명 전파는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자유 한국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호소했다. 미국인을 향해서는 일본을 일찍이 이긴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고 홍보도 했다.
기독교인친한회 설립의 목적은 이 단체를 통하여 미국내의 관계요로와 미국 의회를 상대로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운동을 벌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주미외교위원부의 활동을 지원하는데도 필요했다. 임정의 현순 목사도 한동안 이승만과 미국에서 비슷한 역할을 위해 워싱톤에 머물고 있던 실정이었다.
처음에는 에비슨이 회장이다가 1943년 2월 기독교친한회의 회장은 아메리칸대학의 총장 더글러스(Paul F. Douglass)였고, 에비슨은 서기 겸 재무의 직책을 맡았다. 이사진에는 연방상원의 원목 해리스(Frederick B. Harris), 연방대법원 판사 머피(Frank Murphy), 이승만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의 주요 활동은 회보를 간행하고 회비를 내며 미국 정부 및 의회에의 임정 승인 청원과 대중집회에의 참여하였다. 기독교인친한회는 기독교를 매개로 미국의회와 국무성을 비롯한 여러 필요한 기구에 임정을 승인 받음으로 한국과 한국민에 대한 동정과 지지를 확보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친한회는 한미협회 및 주미외교위원부와 함께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게 임시정부승인을 요청하는 서한들을 보냈다. 마침내 1943년 봄에 미국 하원과 상원에서 한국임시정부승인을 위한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에비슨, 이승만을 중심한 기독교인 친한회의 노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한국임시정부의 승인이 영국과 소련과 같은 연합국과 갈등을 야기 시킬 것이라는 미국국무부의 입장 때문에 채택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이승만 에비슨을 중심한 기독교인친한회를 통한 임시정부 승인운동은 분단을 예견하고 최선을 다해 대처 한점은 높이 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 연세대출판부, 2004. 박명수. ‘해방직전이승만과 기독교 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승인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기독교』. 페이스앤호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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