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가의 한국선교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7.19-1916.10.12) 선교사 가문은 4대에 걸쳐 한국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며 교육, 의료, 정치 및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한국의 근대화와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제1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한국 이름은 원두우이고 그의 아들은 원한경(Horace Horton Underwood, 1890-1951), 그의 손자는 원일한(Horace Gran II Underwood, 1917-2004), 증손자는 원한광(Horace H. Underwood, 1943-)이다. 이러한 그의 직계 자손과 여러 명의 방계 자손이 지난 130여 년간 한국에서 활동하여 원두우는 속칭 신촌 원(元)씨의 조상이 되었다. 4대가 모두 뉴욕의 뉴욕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봉직하였다.
언더우드가는 원래 영국에서 살았다. 그의 증조부 알렉산더 와우(Alexander Waugh)는 회중교회 목사로서 초교파적인 선교활동을 펼쳐 명성을 떨쳤다. 그의 조부는 토마스 언더우드(Thomas Underwood)였고, 부친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 1827-1881)는 깊은 신앙과 좋은 성품을 지닌 사업가였으며, 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언더우드(Elizabeth Grant Marie Underwood)는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원두우는 이들 부부 사이에서 6남매 중 4번째로 태어났다. 영국에서 성장하다가 부모를 따라 1872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원두우는 최초의 장로교 목사 선교사로 내한한 후 새문안교회를 설립하여 한국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191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창립 되었을 때 제1대 총회장이 되었다. 한글 성경번역과 찬송가 편찬을 비롯하여 신문과 전도지 및 각종 문서 출판사업과 연희전문학교 설립 등을 주도해 한국의 근대화에 그의 자취를 강 뚜렷하게 남겼다. 특히 오늘의 연세대학교의 설립을 위한 그의 형 존(John)의 경제적인 희생과 원두우의 자손 4대를 이은 연세대학을 향한 봉사는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본고에서는 제1대 언더우드 목사의 선교활동을 위주로 그의 가문이 기여한 것을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1. 언더우드의 성장배경과 한국 입국
언더우드는 1869년에 형 프레데릭 윌스(Frederick Wills)와 함께 로마가톨릭 계열인 프랑스 볼로뉴의 소년 기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개신교적인 신앙자세를 굽히지 않아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의 가족은 2년 후에 어머니와 동생의 사망과 경제적 시련으로 인해 미국 뉴저지로 이민하였다. 미국에서 언더우드는 화란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에 등록하였고, 1877년에는 뉴욕대학에 입학하여 7마일 거리를 도보로 통학하였다. 1881년 그의 부친이 사망하였으며, 그 해에 화란개혁교회 계통의 뉴브룬스윅(New Brunswick)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가정적인 배경을 통해서 ⑴ 경건주의 신앙, ⑵ 근면, 개척, 발명의 정신, ⑶ 개혁주의 신앙을 얻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언더우드가 선교사가 될 결심을 했던 것은 한 인도인의 강연을 듣고서부터였다. 그는 인도선교를 대비해 신학을 배우고 일 년간 의료공부까지 하였다. 1883년 그는 하트포트(Hartford)에서 열린 신학생 협의회의 대회에 참석하였다. 1883년 초 뉴 브룬스윅 신학교의 선교사 지망생들의 모임은 그가 한국 선교에 나서게 된 발단이 되었다. 그는 일본 주재 선교사 알버트 알트만(Albert Altmans, 1854-1939)이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한 논문을 읽고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고 하는 부담감을 가지게 되어 1년간 고민하였다. “한국에 갈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한국은 어떻게 될까?” 걱정하였다고 한다.
그는 미국북장로교 선교회 간사인 엘린우드(F. F. Ellinwood)의 권고를 받고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가입하였다. 1884년 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여름에 선교사로 임명받은 다음, 11월에 화란개혁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였다. 그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3개월간 체류하면서 이수정을 만나 말을 배우고, 개화파 인사들과 사귀었다. 또 아펜젤러(H. G. Appenzeller)를 만나 같은 이니셜을 가진 두 사람, “Two H. G.”간의 우정도 쌓았다. 그들은 일본 나가사끼를 떠나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을 들고 인천항에 입국하였다. 그들에 앞서 중국에 의료선교사였다가 한국으로 임지를 바꾼 알렌이 와 있었지만, 갑신정변을 목격한 알렌은 정국의 불안을 염려하여 선교사역에 소극적이었고, 1886년 9월 11일부터는 주한 미국공사관 서리공사로 활동하였다.
2. 언더우드(1885-1890년)의 초기 선교활동
언더우드는 선교활동은 금지되어 있었음으로 한 때 선교를 위한 기초의학을 공부했던 것을 바탕으로 4월 10일에 알렌에 의해 개원한 신식병원인 제중원(濟衆院, 첫 명칭은 광혜원)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1886년 3월 29일에 개설된 제중원 의학교에서 물리, 화학, 영어 등을 가르쳤다. 그는 우선적으로 한국어 습득을 위해 노력하여 천주교의 한불자전 편찬작업에 참여하였던 천주교 신자 송덕조(宋德祖)의 도움을 받았다.
한글을 선교공용어로 결정하여성경번역과 출판 사업도 서둘러 행했다. 1887년에는『마가의젼한복음셔언』를 일본에서 간행하였으며, 1887년에는 한글성경 번역과 그 감독을 목적으로 하는 상설성경번역위원회(The Permanent Bible Committee in Korea)를 구성하였다. 감리교의 『찬미가』가 편찬된 뒤 1894년에 『찬양가』를 발간하였다. 한국 최초의 서양 악보서적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도 간행하였다. 1889년에는 송덕조(宋德祖)의 도움을 받아 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와 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 Language(한영부, 영한부)를 발간하였다. 언더우드는 처음에는 이처럼 주어진 여건을 따라 간접적으로 복음전도를 모색하는 방법을 좇았다. 그가 1886년에 세운 고아원은 당시의 간접적인 선교정책을 따른 것이었다. 그 고아원은 처음에 예수교 학당(Jesus Doctrine School)으로 불렸으며, 오늘날 경신고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그는 마침내 직접 선교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서상륜이 1886년에 솔내로 부터 로스(John Ross) 목사의 소개장을 들고 찾아와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줄 것을 요청하였을 때 당장은 응하지 못하였으나, 1887년 1월 23일에 그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3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887년 9월 27일에는 몇몇 선교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문안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노방에서 한국인에게 책자를 나눠주고 한국말로 찬송가를 부르다가 “지각없고 경솔한 짓”을 한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1887년 11월에는 의주까지 순회여행을 하며 복음을 직접 전하였다. 신년 휴일의 긴 기간마저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1888년 봄에는 아펜젤러와 함께 북부지역을 순회 여행하였다. 일부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현 상황에서는 조선 관리들을 자극시키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여행 중에 그는 서울로부터 긴급소환령을 받았다. 기독교 전도금지령이 조선정부로부터 미국공사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금지령으로 5-9월까지 학교의 아침 예배와 주일 예배가 폐지되었다. 1888년 6월에는 영아소동이라 일컫는 외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서양인들이 어린애를 잡아먹고 눈동자는 뽑아 사진기 렌즈를 만든다는 유언비어 때문이었다. 그 일로 감리교측에서는 선교비가 삭감되고 장로교측에서는 선교사 파송이 중단되었다. 이때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우리는 조선국왕의 명령보다도 더 높은 곳의 명령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1888년 11월에 다시금 북부교회 전도여행을 도모해 평양, 장연, 의주 지역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889년 3월에 결혼한 후에는 신혼여행을 빙자하여 북부지방을 순회했다. 이때 미국공사 딘스모아(H. A. Dinsmore)는 시골에 가서 선교행위를 하지 말도록 주의시켰다. 이에 그는 의주에 갔을 때 국경 너머에서 3인의 세례지망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언더우드는 궁궐이나 외아문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하여 그들이 정부의 반감을 유발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는 부인도 민비의 주치의로서 왕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어서 다른 선교사들보다 정세를 파악하는 데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3. 중기(1890-1900년대)의 선교 활동
언더우드는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해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도입하고 활용하였다. 그는 1889년에 4번째 북부지방 순회전도를 떠났을 때 의주에서 선교동역자를 선택하며 네비우스 선교방식대로 피선교국의 교인들이 자급자족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는 네비우스(J. L. Nevius)가 1890년 6월 7일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를 영접하였다. 그 후 1891년에 미국 북장로교 재한 선교회는 남장로교 재한 선교회와 더불어 장로교 공의회를 구성하고 북장로회 선교회 규칙(Presbyterian Northern Mission Rules and By-Laws)을 제정하였다. 그 규칙은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기초로 하여 자립 운영, 자력 전도, 자치의 정신을 명시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언더우드가 부인 호톤 의사의 건강악화로 1891년 3월부터 1893년 2월까지 안식년 휴가를 갖고 있었다.
4. 후기(1900-1916년)의 선교 활동
당시 선교부는 교육을 선교 보조 사업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1905년 숭실에 신설된 대학과정은 예비신학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처음에는 언더우드도 이에 동의하여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은 급선무로 다뤄야 할 직접선교의 영역에서 벗어난다고 여겼다. 1893년에 재한 장로교 선교회는 서민층에 집중하는 선교정책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네비우스와 무관한 것이었고, 언더우드가 한국에 없을 때 결정한 것이었다. 그 정책으로 지방에서는 전도효과를 크게 높일 수 있었으나 중앙에서는 전도에 어려움을 겪었다.
언더우드는 상류 양반층 선교를 위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육의 목적을 원만하고 자격을 구비하고 의욕적인 개인을 생산하는 데 두었다. 그리하여 비기독교인 자녀도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양반들에게 초청장을 보내어 매주 일요일 오후마다 그들을 모으고 예수의 생활을 환등기로 보여주었다. 1895년 민비가 보낸 총리대신이 언더우드를 찾아와서 양반자제를 위한 교육에 매월 2만-3만량을 투자할 뜻을 비쳤을 때는 양반을 전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몹시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 계획은 민비가 시해됨으로 말미암아 무효화되고 말았다. 왕비시해사건 후에 언더우드는 대궐과 공사관 사이에서 통역의 역할을 하며 하루에 두 번씩 입궐하여 고종의 식사보관함을 열어주었다. 이런 언더우드를 윤치호는 왕당파(Strong Royalist)라고 불렀다.
그러한 때에 언더우드는 『독립신문』이 끼치는 영향이 큰 것을 보고 1년 후 『그리스도신문』을 발간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급진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의 부인은 “당시는 때가 무르익지 않았고 국가는 준비되지 않았으며, 기독교인들도 아직 자유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대비되어 있지 않았다”고 회상하였다.
YMCA 사업은 그가 서울에 있으면서 상류사회 청년층의 선교를 급선무라고 느낀 결과 추진된 것이었다. 그는 아펜젤러와 함께 1899년 말 YMCA에 편지를 보내어 한국지부의 설치를 요청했고, 마침내 1903년 황성기독교 청년회가 출범했다. 이는 1899년 1월 만민공동회가 해산된 후 이승만을 비롯한 유식층에게 행한 옥중 선교의 결실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게일과 벙커와 함께 주일 오후면 감옥으로 그들을 심방하여 기독교 서적과 교양서적 등을 차입시키고 신앙상담을 해주었다. 이로써 민중계층 중심이던 한국 기독교계에서 신분계층이 다양해지게 되었다. 이는 언더우드의 선교의 결실로서 기독교가 계층을 초월해 민족종교로 성장하는 직접적인 계기를 이룬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독립신문과 아펜젤러의 『죠션크리스도인회보』 발행에 자극을 받아 1897년 4월 1일에 『그리스도신문』을 창간하였다. 간행비는 자신이 마련하였다. 이 신문은 생활계몽적인 내용으로 기독교의 영향력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데에 발간 목적을 두고 있었다. 1897년에는 교회 통신이 모두 74회, 공업진흥논설이 100회, 농업개량논설이 99회, 세계소식과 일반교양이 105회 게재되었다. 교회 통신은 1/4의 분량밖에 실리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이 같은 「그리스도신문」 467부를 사서 367개 군과 10개 부처에 배부하였다. 이 신문은 1901년 폐간되었는데, 몇몇 선교사들이 선교사의 사적인 신문발행과 그 신문 내용 및 광고에 반대하며 신문발간의 중지를 계속 요청함에 따라 친선을 위해 중지한 것이었다.
언더우드의 선교행적이 정점에 달했던 때는 1900년에서 1916년까지 목숨 걸고 대학 설립을 추진하던 시기였다. 언더우드는 1896년 서울에서 고아들 같은 불우아동을 가르칠 때부터 대학교와 신학교를 세울 꿈을 품었다. 선교 초기 서민층 선교에 몰두하던 언더우드는 독립협회의 활동을 보고 방향을 바꾸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급 대학 설립이라는 고등교육 선교정책에 몰두하였다.
그는 사회복음주의자는 아니었고, 인간 생활의 전 영역이 기독교적으로 변화해야 하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일을 성사시키기까지 동료 선교사와 형제들의 빈정거림으로 생명을 단축하는 산고를 겪어야 했다. 그는 1887년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라는 세계선교평론지 (世界宣敎評論誌)에 글을 기록하면서 기독교 대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888년 9월 8일에는 미국공사 딘스모어를 통해 한국정부의 외아문 독판서리 이중칠 앞으로 대학설립의 허가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하교가 내릴 때까지 기다리라는 통고를 받고 대학설치안을 유보하였다. 목회자 양성 위주의 교육보다 폭넓은 교육을 소망하고 있던 언더우드는 1906년에 다시 고등교육기관을 서울에 설립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것은 평양 선교사들의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진일보한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여겼던 서울 주재 선교사들의 공통된 생각이 표현된 것이었다.
그가 구상한 대학은 농공상업, 문화, 교육 분야를 포괄하는 종합대학이었다. 1908년 그는 평양과 서울 두 곳에 대학을 설립하자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1910년에 모인 선교회 연례회의는 대학을 세우는 일을 착수하지 말 것을 결의하였다. 세속적 사상에 의해 기독교적 이상이 흐려지고 약화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결정권은 미국에 있는 한국 교육사업 연합위원회(The Joint Committee on Education in Korea)에 넘겨졌다. 그들은 서울에 하나의 대학이 있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마침내 그의 친형이 거액을 희사하여 1915년에 대학이 설립되었고, 원두우는 초대 교장이 되었다. 그는 말년에 대학설립 문제로 건강을 잃고 1916년 미국에서 소천 했다.
원두우의 유지를 이어 외아들 원한경이 일제하 3대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봉직하였고 해방 후그의 부인이 좌익에 피살 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손자 원일한은 한국전쟁 후에 연세대학교를 복구 발전시키는 일에 기여했다. 그의 증손자 원한광은 2004년까지 연세대에서 교수로 봉사하였고 재단 이사로도 활동하였다. 4대를 이은 언더우드가의 희생과 봉사는 오늘날 한국기독교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북한에서는 ‘천리마’란 잡지에 1년간 언더우드 가에 관해 연재하면서 4대에 걸쳐 조선민중의 피를 빨아 먹은 흡혈귀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선교활동비는 대부분이 그의 형의 개인 헌금에 의한 것이었다. <저작권자 ⓒ 최재건의 역사탐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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