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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이야기 20

언더우드 정신의 계승

최재건 | 기사입력 2020/12/16 [18:16]

언더우드이야기 20

언더우드 정신의 계승

최재건 | 입력 : 2020/12/16 [18:16]
[한국 기독교 초석 놓은 언더우드] (20·끝) 언더우드 정신 계승 기사의 사진
언더우드는 병상에 누울 때까지 한국 선교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현재 연세대 교정에 세워진 언더우드의 동상. 허란 인턴기자
 
언더우드는 필생의 선교사업인 대학 설립의 꿈을 이뤄냈다. 그 과정에서 동료 선교사들 다수가 반대했고, 이런 까닭에 그의 친지들은 그에게 선교회를 탈퇴하고 독자적으로 추진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그는 교단 선교회를 떠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른 교단 선교회까지 참여케 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교회의 하나 됨을 구현했다.

57세의 나이로 별세

이러한 에큐메니컬 정신은 연세 신학의 전통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그는 건강을 잃었다. 일본 조선총독부의 교육 시책도 건강 악화를 부추겼다. 그 시책이란 총독부가 일본어 구사를 교육 현장의 수장이 되기 위한 필수요건으로 정한 것이었다. 그에 따라 언더우드는 일본어를 습득하기 위해 도쿄의 일본어학교에서 매일 9시간씩 정규수업을 받은 것 외에도 아침과 저녁에 개인교습까지 받으면서 강행군을 했다.

그 무렵 한국으로 보낸 편지에서도 그는 위장이 나빠 음식의 소화도 힘든데 일본어까지 소화하려니 더 힘들다고 하는 재치 있는 글을 남겼다. 건강이 악화되자 일단 한국으로 돌아와 급선무를 처리한 다음 미국으로 치료를 받기 위해 떠났다. 미국에서는 누이의 집에 머물다가 뉴저지의 애틀랜틱시티로 옮겨 요양했다.

그는 병상에 누웠어도 기력을 다할 때까지 새 대학의 발전을 위해 사람을 만났고 비서를 통해 업무를 처리했다. 그는 삶의 마지막 해인 1915년 4월 1일부터 1916년 4월까지 1년여 동안 2300통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편지를 썼다. 이때 그는 조선기독대학장 외에 전국주일학교대회장, 피어슨성경학원장, 성경개역위원장, 조선예수교서회 실행위원장, 새문안교회 목사 등 여러 직책을 맡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결국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30분 애틀랜틱시티에서 5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한국 선교 31년 만이었다. 그의 유해는 그를 파송했던 뉴욕 브루클린의 라파엣교회 묘지에 묻혔다. 고종은 그의 공을 기려 태극훈장을 내렸다.

한국 정부는 다시금 1963년 광복절 18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대통령상을 내렸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27년 새문안교회당 안에 기념비를 세웠다. 연세대학교는 교정에 그의 동상을 3번이나 다시 세웠다. 1928년 처음 세운 것은 일제 강점기 말에 공출당했다. 두 번째는 1948년 10월에 세웠다가 인민군에 파괴당했다. 세 번째로 1955년 4월에 세운 것이 현존하고 있다. 그는 죽어서도 그의 동상을 통해 한국 민족의 수난을 함께 겪었다.

‘한국은 나의 조국’

그의 비문에는 ‘Messenger of God’(하나님의 사자), ‘Follower of Christ’(그리스도의 추종자), ‘Friend of Korea’(한국의 친구)가 새겨있다. 문구는 그의 삶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명령을 좇아 이 땅에 왔다. 한국 근대화와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해 한국의 친구가 되었다.

비문 말미에는 정인보 선생이 쓴 “뉘 박사의 일생을 57세라 하더뇨? 박사 의연히 여기 계시도다”라는 글귀가 있다. 이 비문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의 정신과 비전, 뜻이 계승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더우드 사후에도 그의 형은 오늘날 연세대의 본관인 언더우드관을 짓도록 건축비 전액을 희사했고, 그의 후손들은 지금까지 4대에 걸쳐 연세대와 한국 땅에서 봉사하며 그의 뜻을 계승해오고 있다.

언더우드는 임종 하루 전에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의 바람은 뒤늦게나마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이장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는 청년기 이후의 생애를 한국에서 보냈고 ‘한국도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라고 고백했다. 언더우드의 정신과 비전 희생 봉사는 계승되어야 할 한국교회의 유산이요 전통이며 사명이다.

그는 교세가 미약했던 1904년 한국선교 20주년 기념 선교대회 연설에서 ‘기독교한국(A Christian Korea)’의 꿈을 피력했다. 그의 소망대로 한국교회는 선교대국이 됐다. 그는 당시 장차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넘어 선교를 주도하리라고 보았다. 놀라운 선견지명이었다.

필생의 과업인 대학 설립의 꿈도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으로 실현되었다가 해방 후 연희대학과 세브란스의대가 통합하면서 연세대로 발전했다. 교명 연세(延世)는 세계로 뻗어간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연세대는 인천 송도캠퍼스에 외국인을 위한 영어 전용 신학대학원을 세워 한국신학의 세계화를 꿈꾸고 있다. 1885년 인천을 통해 들어왔던 복음의 씨앗이 이제 인천을 통해 세계 복음화의 열매로 나가게 된 것이다.

“주 강생 천 팔백 팔십 오년 사월에 박사 이십오세의 장년으로 걸음을 이 땅에 옮겨 삼십삼년 동안 선교의 공적이 널리 사방에 퍼지고 큰 학교로는 연희전문이 이루히니 그럴 사 박사 늙으시도다. 신학문학의 높은 학위는 박사 이를 빌어 무거움이 아니라 얼굴로조차 얼른 살피기 어려우나 이렇듯이 연세보다 지나 쇠함을 볼 때 누구든지 조선 민중의 믿음과 슬기를 돕는 그의 평생을 생각할지로다. 베푼바 날로 늘어감을 따라 우리의 사모-갈수록 깊으매 적은 힘을 모아 부은 구리로서나 방불함을 찾으려함이라 뉘 박사의 일생을 오십칠세라 하더냐 박사 의연히 여기 계시도다.”(정인보)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2840596&code=23111117&sid1=c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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