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문제로 인한 신해(1791) 진산사건
1) 배경과 시작 조선에 가톨릭교회가 설립된 지 6년이 되던 해 정조15년(1791)이었다. 전라도 진산에 살던 선비 윤지충과 그의 외종형 권상연이 전통의 조상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조선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이미 북경 주교에게 자문을 구한 바 있었다. 그 때 북경주교의 입장은 확고했다. 중국에서도 이미 전례문제가 큰 논란이 되었었기 때문이다. 17-8세기에 예수회가 주축이 되어 중국에 선교할 때는 보유론적 입장에서 제사가 별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1773년 예수회가 해산된 후부터는 이를 꾸준히 문제시해온 도미니칸과 프랜시스칸 수도회에 의해 우상숭배로 인정되었다. 조선교회는 1789-1790년에 윤유일을 통해 북경교구에 자문을 구했을 때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주교는 조상제사를 금지하라고 지시했다. 조선교회에서 전례문제는 전라도 진산에 살던 윤지충이 1791년 5월에 모친(권씨)상을 당하여 그의 외사촌형 권상연과 상의하여 절충적인 방법을 택했던 일에서 발단되었다. 그는 구베아의 명령과 그의 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모든 장례 절차는 유교식을 취하여 정성껏 이행하되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사는 지내지 않기로 하였다. 윤지충은 계묘(癸卯, 1783)년에 진사시험에서 합격한 다음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서울에 사는 인척 정약용의 집에서 기거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김범우의 집에서 열린 강학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으며, 김범우의 책을 복사하여 공부한지 3년 뒤에 정약전으로부터 바울이란 이름으로 영세를 받았다. 권상연은 사촌인 윤지충에게서 책을 빌려보고 역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후에 자기와 함께 순교하게 될 외종형 권상연을 감화시켜 야고보(Jacob)란 교명으로 영세를 받게 했고, 전라도의 유항검, 유관검 형제와 그의 동생 윤지헌에게 전도하였으며, 한덕운(韓德運)과 최여겸에게도 전도하였다. 그는 “사대부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여 하나님 지상주의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 확신을 가졌다. 조상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사른 그들의 행동은 조문객들의 입을 통해 퍼져나갔다. 이 일은 1787년의 반촌사건 때부터 이단 척결을 주장해온 홍낙안을 자극시켰다. 그는 좌의정 채제공과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편지를 써서 윤치충을 처단할 것을 촉구하고 진산 군수가 이 일을 방치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윤지충의 무리는 심지어 일시적인 신위와 대대로 전해온 조상의 신위를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조상제사를 거부하는 무뢰배와 짐승 같은 자들입니다. 더욱이 그는 그의 조상의 신위를 태우고 땅에 묻었습니다. 그의 그 같은 행위를 모르는 자들이 문상했을 때 그는 한번은 이 일은 그들에게 애도할 일이 아니라 축하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처단되지 않기 때문에 이 같은 극악한 짓이 발생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삼강오륜이 있어야 할 자리, 곧 조선 역사 4000년 동안 지켜온 예의의 땅이 금수과 무뢰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는 서학이 부도덕한 이론으로 세상을 미혹시키고 사람들을 기만하는 종교라고 믿었다.
계속해서 홍낙안은 채제공에게 국가가 재앙에 빠지지 않으려면 윤지충과 권상연을 반역죄로 벌하되, 그를 처단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머리를 베어 거리에 매달고 그들의 집들은 못질을 하여 폐쇄시키고 그 마을은 불태워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홍낙안의 긴 편지 내용이 알려지면서 유생들뿐만 아니라 관료들과 일반 백성들로부터까지 그들을 벌할 것을 간하는 상소가 왕에게 빗발쳤다. 진사 채조를 비롯한 다섯 명은 윤지충이 조상제사를 거부한 두렵고 악한 일을 근절시켜야 한다는 글을 돌렸다. 1791년 10월 중에 그들은 서학이 완전히 근절되도록 왕이 분노집회를 개최하는 것을 알리도록 요구하는 청원서를 추가로 살포하였다.
2) 경과 윤지충의 조상제사 거부는, 비록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일어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사회를 크게 뒤흔들었다. 진산 군수 신사원은 윤지충의 집을 조사하였으나, 신주 단지가 비어 있는 사실만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 사실을 전라도 관찰사에게 보고하였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라는 영을 받았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도망하였으나, 윤치충의 삼촌 윤증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고 26일에 돌아와 군수에게 자수하였다. 그들은 관찰사에게 이송 수감되고 심문받았다. 관찰사 정민시의 심문에서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갑진(1784)년 겨울 서울에 머물 때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실의」와 「七克」을 빌려와서 독자적으로 탐구했기 때문에 천주교를 가르쳐준 사람도 없었고 가르친 사람도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윤지충 자신은 그의 책을 불질렀거나 물속에 넣어버렸다고 공술하였다. 그의 동생 지헌은 공술에서 “저희 형이 살았을 때 강습한 책들은 그의 집에 두었습니다,” “그 책을 유항검 형제에게 빌려주어 포교활동에 사용하였습니다”라고 다르게 말했다. 이처럼 공술이 다른 것은 형벌의 문제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지충은 자기가 조상제사를 거부한 사실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진술하였다. 그는 신주는 가톨릭에서 금하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그것을 뜰에 묻고 예식을 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렇지만 그가 문상도 받지 않았고 모친의 시신을 버렸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그는 심문관에게 “천주교에서는 장례를 더욱 성심껏 하도록 가르치는 데 제가 어떻게 감히 부주의하게 어머니를 위해 애도하는 예법을 소홀히 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호소하였다. 그는 더욱 심도 있게 증언하였다:
제가 만일 저의 천주교 신앙 때문에 설혹 양반 신분을 박탈당할지라도 저는 상제를 거역하는 죄를 범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죽은 자에게 술과 음식을 바치는 것은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나라에서는 일반 백성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벌을 내리는 가혹한 법이 없고, 너무 가난해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선비에게도 엄하게 벌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상을 차리거나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며, 천주교 신앙의 율법에도 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라 관찰사의 보고를 접하고서 평소에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벌하는 일에 관해 온건한 태도를 보이던 채제공은 1791년 11월 8일 사건을 판결하는 마지막 회의에서 매우 가혹한 형을 내릴 것을 건의하였다: 곧 “그들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참수하고, 그 날 어느 시각에 이르렀든지, 반드시 머리를 5일 동안 효수하여 윤리의 소중함과 서학에 물들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야 할 필요를 만방에 알려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그가 이 같은 결론에 이른 것은 격앙된 일반 여론 앞에서 관대하게 비쳐질까봐 두려워하였고, 그의 명성과 사회적 위치와 가문을 보전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드디어 약 30개의 처벌요구서들이 정부로부터 도달하였고, 윤지충은 33세, 권상연은 41세를 일기로 을사(乙巳, 1791)년 11월 13일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수되넜다. 조선 가톨릭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이 신해년의 진산사건은 조상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 교인을 다루는 정부의 해결책이 처음으로 공표된 것이었다. 진산사건으로 인해 윤(尹)과 권(權)이 사형당한 일 외에도, 진산 군수 심사원이 파면되었고, 그 지역 관청의 급이 강등되었다.
3) 조상제사 문제를 둘러싼 논리의 대립 이 사건은 기독교의 천당지옥설을 비판하는 유교 세계에 기독교가 또한 유교 제사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후생명의 문제에 관해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에 있어서 수백 년 동안 관혼상제(冠婚喪祭)와 가묘입사(家廟立祀)는 사대부, 양반 가문의 근본예속이었으므로 폐제사(廢祭祀)나 폐신주(廢神主)는 상상할 수도 없는 패륜(悖倫) 패리(悖理)였다. 아울러 유교의 정학(正學)ㆍ성학(聖學)을 부인하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폐제사 문제에 대해 유가에서 내세우는 기본논리는 부모께 제사를 드릴 “후손이 없는 것이 최대의 불효”라는 맹자의 가르침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폐제사하는 서학은 무부무군(無父無君)하고 패륜난상(悖倫亂常)함이 오랑캐나 동물만도 못한 도라고 인식하였다. 폐제사는 아버지의 권위를 실추시킴으로써 가부장적 대가족주의에의 도전하는 동시에 전통문화의 가치체계에 도전하는 위험한 것으로 비쳐졌다. 유교인들은 조상제사의 근본 의의를 신령의 음향 여하보다도 자손의 보본(報本) 및 보은(報恩)과 존사여사생(尊死如事生, 죽은 자 섬기기를 산 자처럼)이라하여 죽어도 계속되는 효도에 두었다. 반면에 천주교회는 신령의 음향을 유교제사의 목적으로 이해하여―공격용 논리였겠지만―사후(死後)의 영혼은 제사를 흠향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효도의 상징적 제물 역시 허례가식으로 인식했다. 나아가서, 유교에서는 천자가 천하민(天下民)을 대표해서 천(天)에 드리는 제사와 조상제사를 구별하지만, 천주교에서는 천주께만 예배하고 그 외는 모두 다 폐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서학은 부모와 군주 위에 절대적이고 초월적이며 근본적인 하나님을 내세우고 있었다. “주 너의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한 십계의 제일 계명에는 사군(事君)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으며 부모공경은 그 다음에 언급되는 것이 유교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천주교인들은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종교라는 말로 박해를 정당화하고 비난하는 데 대해 대군대부(大君大父)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천주는 천지의 창조자이므로 대군(大君)이고 인류의 아버지이므로 대부(大父)가 된다는 의미였다. 윤지충은 폐제사의 이유를 묻는 물음에 “천주를 대부모로 받드는 이상 천주의 명을 준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흠숭의 도리가 아닙니다…”라고 확답했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천주교가 “상제를 제1부(父)로 여기며 예수(造化翁)를 제2부로, 생부(生父)를 도리어 제3에 두게 되니 이는 윤리를 없애고 도의를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인륜의 근본인 효(孝)를 부인하고 천(天)만 대부모(大父母)로 알되 부모의 생육지은(生育之恩)을 모르는 금수(禽獸)라고 비판했다. 윤지충은 또한 공술에서 천주의 절대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큰 부모로 삼는 것만큼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를 숭배하는 뜻이 아닌 데다가 사대부집의 나무 신주는 천주교에서 금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사대부에 대해 죄를 지을지언정 하나님 앞에 죄를 짓기를 원하지는 않겠다고 하여 천주교의 교리를 따르기를 선택했다. 윤지충은 판관 앞에서 충(忠)의 근거도 효(孝)의 근거도 모두 천주의 명령에 있는 것이고 사실 천주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고 천지의 대군대부(大君大夫)인 이상 당연히 육친(肉親)인 세속의 군부(君父) 이상의 절대적 존재여야 함을 변호했다. 그러나 판관은 삼강오륜을 지키는 것이 바로 상제를 섬기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이에 대해 지충은 죽은 사람 앞에 먹으라고 음식을 차려놓는 것이나 한 조각의 나무토막에 불과한 신주를 세우지 않는 것은 오로지 천주를 위하는 행위요 임금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고 또 관계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불충의 행위가 되거나 국가의 금령에 저촉되는 것 같지 않다고 하였다. 이처럼 인격신(人格神)의 절대권을 주장하는 서학과 인륜지상(人倫至上)을 내세우는 주자학과의 충돌과 반목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윤지충은 사실 유교가 양반과 정권에 예속되어 정권유지에 이용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정조 신해년(1791)의 박해가 일어난 것은 폐제(廢祭)라는 종교적 이유 하나 때문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벽(時辟)의 대립이란 정치적 이유 하나 때문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사대부라면 누구나 유교를 신봉하고 있었고 또 신봉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으며 특정 정파(政派)에도 가담하고 있어야 했던 사회 정황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므로 그 박해에는 두 가지 요인이 함께 작용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진산사건의 확대 이 진산사건을 공론화시키고 그들을 처단시키도록 부추긴 홍낙안과 목만중과 이기경―그들도 남인에 속한 자들이었다―은 이단척결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왕에게 제출하고, 천주교의 지도자들을 고발하는 한편, 천주교를 엄금하는 정부의 선언을 이끌어냈다. 홍낙안이 진산사건을 고발하는 그의 긴 편지에서 주장한 것은 이 사건을 윤(尹)과 권(權), 양인의 처단으로 끝내지 말고 사서(邪書)구입과 간행의 문제로 확대시키자는 것이었다. 대사간 권이강(權以綱)은 정종 15년 10월 30일 “홍낙안의 글 가운데 (그들이) (서학)책을 간행했다고 하니 그 사실을 본인에게 물어서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자”는 글을 올렸다. 정조는 이에 대해 승정원으로 하여금 간책(刊冊)이 누구의 소위인지 홍낙안에게 물어서 다시 상주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승정원은 홍낙안이 간행한 책을 직접 보았던 것이 아니라 전 승지 이수하(李秀夏)로부터 들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책을 간행한 것보다 더한 것은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수백 권의 사학서적을 가져와서 펴뜨린 평택현감 이승훈의 행위라고 보고하였다. 그는 이승훈이 책을 간행하지 않았을지라도 금서를 사장(私藏)한 것은 마찬가지로 불법을 행한 것이라고 몰아세워 반대파의 공격의 일단을 보여주었다. 유생들도 같은 입장에 섰다. 이에 사헌부를 통해 정식으로 처리할 것이 주청되었는데, 사헌부에서는 “만일 나타나는 자가 있으면 그들의 책을 불사르고 그들을 죄줌으로써 백성의 마음을 바로잡고 반란의 근거를 막기 바랍니다”고 임금께 고하였다. 그 후에도 진산사건에 대한 상소는 계속되었다. 대사간 신기는 상소하기를 “권가 윤가 두 역적은 … 한 시각이라도 하늘 땅 사이에 살려둘 수 없는 자입니다…”라고 하였다. 결국 정조는 법대로 엄히 다스릴 것을 비답으로 내렸다. 이 주장은 홍낙안과 이기경에 의해서 더욱 문제시되었다. 홍낙안은 권일신이 교주임이 분명하다고 고발하였다. 목만중도 이승훈과 권일신이 각각 사학의 무리임을 들고 나왔다. 이들은 모두 벽파의 인물로써 사학을 빙자하여 시파인사들을 성토하였다. 결국 이 사건의 여파로 서학도들이 체포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그들은 이승훈과 권일신을 체포 심문하였다. 권일신은 목만중 부자가 자기를 교주라고 모함한 것은 평소 원한을 보복하려는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승훈은 면직되어 예산으로 유배되고, 권일신도 유배되었다. 그는 형조의 권고와 노모인 풍산 홍씨에 대한 불효감으로 인해 회오문(悔悟文)을 지어 바쳐 유배지가 예산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형벌로 얻은 상처로 인해 사망하였다. 채제공은 안정복과 더불어 다른 남인 원로들처럼 내부적으로 자체 경계를 시키면서 외부적으로 방어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정조로 하여금 온건책을 쓰는데 일조하여 문제의 뿌리를 배양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에 사태가 종교적인데서 정치적 요소까지 가미되어가자 채제공은 장서를 쓴 홍낙안과 그와 관련된 몇 명의 죄도 엄히 다스리려 하였다. 이 기미를 알아챈 홍낙안은 채제공의 아들 홍원(洪遠)을 만나 정약용도 연계되었다고 협박하여 엄벌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한편 홍낙안이 체제공에게 긴 편지를 보냈다는 소식을 들은 정약용은 그 진상을 파악키 위해 체제공의 아들 홍원을 만났다. 정약용은 “홍낙안의 거사는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채홍원의 마음을 돌렸다. 채홍원은 그의 부친에게 홍낙안의 협잡을 의식하게 하였으며, 채제공은 장서(長書)의 이면을 파악하고서 홍낙안의 편지를 태우고 국왕에게는 말로서 직접 아뢰기로 하였다. 예조좌랑 윤극배(尹克培)도 “(洪党의) 김종수, 심환지 등이 극비리에 모의하여 밖으로는 척사(斥邪)라는 명분을 내세우나 안으로는 묶어 타도하려는 계략을 꾸며 … 대감을 해치려는 것으로 우리(蔡党)를 해롭게 할 뿐이오”라고 하였다. 결국 정치적인 저의를 가지고 패륜행위를 빙자하여 조선 후기 사회를 동요케 한 긴 편지의 장본인인 홍낙안과 이기경도 당쟁적 비화를 막기 위해 유배되었다. 진산사건에 대한 정조의 입장은 서학에 대한 기본입장과 다름이 없었다. 정학(正學)을 밝히면 사설(邪說)이 그치게 될 것이라고 하여, 근본을 중시하자는 것이었다. 천주교에 대해서는 엄히 금하도록 명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형조에서 다스리도록 했다. 천주교인들은 그 지위가 박탈되거나 강등되었다. 또 아국인(我國人)이나 청국인이 국경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지령은 전반적인 박해를 방지하려는 예방책이었다. 비변사에서 사간원이 그 싹이 점점 성해진다고 상소했을 때는 책을 수입하는 길이 이미 끊어졌으니 국내에 있는 책을 수집하여 불사르고 위반자는 엄격하게 금지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런 면은 신해 년의 진산사건 때 사헌부에서 그들에게 엄벌을 내리고 서학서와 서학도들을 잘 다스려 반란의 근거를 막도록 임금께 고했을 때 정조는 해당 도에서 법대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왕은 “한 두 명의 보잘것없는 자들이 윤리를 어기고 법에 저촉되는 짓을 한 일에 대해 그것을 처리하는 데는 감사 한 명이면 충분할 것이다”라고 하고, “이미 드러난 자는 도백(道伯)에게 맡겨 엄중히 조사케 하였으나 혹시 아직 적발되지 않은 자가 있을지라도 차마 끝까지 수색해서 스스로 개신할 길을 막을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대사간 신기의 상소에 대해서도 법대로 다스리도록 하여 잇따른 상소에도 불구하고 온건한 척사의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 정조는 이러한 태도로써 사건을 해당지역에 맡겨 문제의 확산을 막으려 하였고, 이미 드러난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하면 홍낙안도 유배시켜 양쪽을 모두 제어하였다.
5) 결과 이 사건 이후로 유교적인 집권 당사자들은 100여 년 동안 천주교도를 금수를 다루듯이 아무 미련도 연민도 없이 박해하고 학살하였다. 더불어 조상제사의 거부를 금수의 행위로 보는 논리(廢祭 → 無父 → 無倫 → 禽獸)가 조성되어 학살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이런 교조적 단정은 쉽게 수긍될 수 있는 설득논리였다. 신유교난 때 공술(供述)이나 기록에 의거 폐제훼주(廢祭毁主) 불참제사(不參祭祀)한 신자는 유항검(柳恒儉)과 유관검(柳觀儉), 정약종(丁若鍾)과 정철상(丁哲祥) 부자, 윤지헌(尹持憲), 황사영(黃嗣永), 이중배(李中培), 임희영(任喜永), 정종호(鄭宗浩), 유한숙(兪汗淑)이었다. 그밖에 이기연(李箕延), 한정흠(韓正欽), 정광수(鄭光受), 이국승(李國昇)(이상은 양반), 최창현(崔昌縣), 최인철(崔仁喆)(이상 中人), 고광성(高光晟), 이부춘(李富春), 이지번(李枝蕃), 박취득(朴取得)이 있었고(이상 良民), 여자신도로는 강완숙(姜完淑), 윤운혜(尹雲惠)(이상 양반), 강경복(姜景福), 정복혜(丁福惠)가(이상 양민) 있었다. 폐제의 타당성을 주장한 자로서 원경도(元景道), 김백순(金伯淳)(이상 양반), 김정득(金丁得)(이상 양민)이 있었다. 양반층 교인들에게는 새로운 결단이 요청되었다. 그들은 제사를 효심(孝心)의 자연스런 발로로 인정하고 특권신분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북경주재 구베아 주교의 제사금지는 그들이 보유론에 마냥 안주해 있지 못하고 유교나 천주교 중에서 택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그들을 몰아갔다. 제사를 실행하면 교회로부터 단죄를, 제사를 거부하면 국가와 가족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양반 교인들이 상당수 교회를 떠났다. 진산사건은 사회신분의 구조적 특징을 결정지어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서학도들은 직업 면에서도 신분구조의 해체에 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위정자들은 천주교를 유교의 신분질서를 무시한 패륜집단으로 규정했다. “사학(邪學)은 본래 상하(上下)의 구분이 없으므로 노복지구(奴僕之口)라도 또한 내장이나 밥통과 같이 (그 상전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신분질서의 평등화 현상은 양반 교인들이 다수 교회를 떠나고 스스로 신분을 포기한 서민적 양반이나 중인(中人) 또는 상인(常人)의 교계 내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조직적인 면에서도 양반층 대신 역관과 의원 중심의 중인들이 새로이 교회 지도층을 이루게 되었고, 봉제사(奉祭祀)가 문제시되지 않는 서민층과 부녀자들이 일반 신도층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유박해 무렵에는 그들 중 부녀자가 2/3였고 천민이 1/3였으며, 사대부 남자는 지극히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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