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선, 이기선 목사
이기선(李基宣, 1878-1950?)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선 투사였다. 그는 조선후기에 태어나 대한제국 시기 기독교에 입신하였다. 일제(日帝) 시대에는 여러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쟁쟁한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또한 일제의 강압적인 신사참배(神社參拜)에 저항하여 전국적인 반대운동을 주도하였고, 이로 인해 7년 이상의 옥고(獄苦)를 겪었다. 그는 해방 이후 교회 정화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북한(北韓) 공산당 정권과 이에 동조한 기독교인들 그리고 신사참배를 한 것에 대해 통회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의 배척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켰고 성도들을 이끌었다. 해방후 북한의 공산 정권에도 반기를 든 그는 마침내 1950년 겨울 6.25 동란 속에 행방불명 되어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기선은 1876년 일본의 함포공격에 의한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한지 2년 후인 1878년 10월 1일 평안남도 박천군 남면 남6리(南六里)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서당에서 3년간 한문 교육을 받았다. 성장하면서 곧 생업에 뛰어들어 포목상(布木商)을 경영하였다. 그의 부지런하고 성실함으로 인해 사업은 점차 활기를 띄게 되었다.
이기선이 기독교를 접한 것은 러일전쟁(露日戰爭)이 일어난 1904년으로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예수님을 영접한 뒤에 열과 성을 다해 교회에서 봉사한 이기선은 몇 해 지나지 않아 교회의 영수(領袖, Unordained elder,지금은 거의 없어진 제도로 한국 초대교회에는 장로와 같은 역할을 했다. 장로로 장립을 하지 않은 미조직 교회를 이끌어가는 평신도 대표)로 선출되었다. 당시 여러 후보 중 만장일치로 선출된 이기선에게 선교사는 자기 자신에게 투표한 것을 문제로 삼자, 본인이 스스로를 신임할 수 없다면 어찌 맡은 직분을 수행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여 오히려 선교사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
1908년 이기선은 성직자가 되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의주교회(新義州敎會) 전도사가 되었다. 그는 안정적인 수익을 내던 포목상을 정리하고 얼마 되지 않는 보수를 받고 전도사로 일하는 것에 대해 가족들은 반대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았다. 이기선은 1911년 봄에 33세의 나이로 흔히들 평양신학교라고 불리는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는 1901년에 선교사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t, 馬布三悅, 1864-1939)이 초대 교장을 맡아 개교하였다 내한 4개 장로교 선교회의 연합기구인 장로회공의회(長老會公議會)로부터 평양연합신학교(平壤聯合神學校)라는 명칭으로 정식 승인되었다. 1907년 길선주(吉善宙, 1869-1935), 방기창(邦基昌, 1851-1911), 서경조(徐景祚, 1852-1938), 송인서(宋麟瑞), 이기풍(李基豊, 1865-1942), 양전백(梁甸伯, 1869-1933), 한석진(韓錫晋, 1868-1939)의 제1회 졸업생 7명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가 되었고 독노회를 구성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유일한 조선의 장로교를 대표하는 신학교였다. 이 신학교는 1938년 9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무기 폐교를 선언하였다.
이기선은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제8회 졸업생)하였고, 같은 해 8월 25일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방지일(方之日) 목사의 아버지로 중국 산동성의 초대 선교사인 방효원(方孝元, 1886-1953) 목사가 동기이다. 같은 해 부임한 첫 시무교회는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고령면(古寧面)에 있는 영산읍교회(永山邑敎會)였다. 이기선 목사는 이 시기 성경연구에 몰두하여 성서를 수백 번 통독하였다. 그는 구약은 하나님의 설교집이고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설교집이며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성령님의 설교집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의 여부는 순종해보면 누구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알 수 있다.”라고 말하며 전도하였다.
또한 이기선 목사가 영산읍교회에 부임할 당시 큰 가뭄이 들어 인근 주민들 사이에 난리가 났다. 영산읍은 평소 강우량이 충분한 지역이라 가뭄에 대한 대비가 상대적으로 부족하여 더 문제가 된 것이다. 주민들이 기우제를 올리려고 하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강력하게 이를 제지하였다. 화가 난 주민들은 기도로 비가 내릴 수 있느냐고 맞섰다. 이에 대해 이기선 목사의 제자인 고(故) 김정덕 목사는 『폭풍속의 별, 이기선 목사의 생애』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그러나 그들 앞에 질수는 없었다. “예, 한주일동안 내가 이곳에서 기도하면 비가 옵니다.”라고 힘 있게 허세라도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타협합시다. 만일 일주일 안에 비가 오면 우리가 예수를 믿겠소. 만일 비가 오지 않으면 예배당은 헐어버리겠소.” 하면서 이곳 대답도 듣지 않고 조소하면서 산을 내려갔다. 이 목사는 그곳에서 결사적인 금식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엿새를 기도해도 비는 오지 않았다. 이 목사는 “하나님 만일 오늘밤 비를 주지 않으시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욕을 돌리고 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욕을 돌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님 비를 주지 않으시려면 범을 보내주셔서 범에게 잡혀먹는 것이 오히려 낫겠습니다.”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마지막 날 밤은 비를 원하는 기도가 범을 요구하는 기도로 변했다. 그래서 나무 가지만 흔들려도 범이 나오나하고 고대했는데 끝내 범은 나타나지 않고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감격하여 울기만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이 목사는 ‘영짜배기’라는 별명을 받게 됐다. 그리하여 교회는 삽시간에 부흥되어 큰 교회를 건축했던 것이다.
영산읍교회가 부흥해 가면서 안정되자, 이기선 목사는 1917년부터 1918년까지 경상남도(慶尙南道) 울산군(蔚山郡)에 위치한 울산읍교회(蔚山邑敎會)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사실 평남노회와 영산읍교회에서는 이기선 목사를 붙잡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는 당시 상대적으로 교회의 세력이 확장된 평안도 지역에 비해 개척초기라 할 정도로 상황이 열악한 경상남도 지역의 청빙을 거절할 수 없었다.
새로운 임지의 80여명의 교인들 중 상당수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아 신앙생활의 원칙을 강조하는 이기선 목사와는 많은 갈등이 생겨났다. 이 목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울산읍교회를 사직하고 경남 일대의 교회를 순회하며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이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많은 병자들이 치유되는 이적이 일어났다. 특별히 김해읍교회(金海邑敎會)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에는 불법 의료행위로 의심을 받아 김해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이 사건이 인연이 되어 이기선 목사는 40세가 되던 1918년부터 1930년까지 김해읍교회를 담임하였다. 희생적이고 열성적인 사역으로 이기선 목사의 영향력은 경남지역에 갈수록 커져갔다. 이목사는 1923년 1월 10일 제14회 경남노회에서 선생은 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김해읍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이기선 목사는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는데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선생의 인품과 지도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그 대표적 인물로 우선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를 들 수 있다. 주기철 목사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의 상과(商科)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고향인 창원(昌原)에 내려와 있다가 이기선 목사의 중매로 김해읍교회 교인인 3살 연하의 안갑수(安甲守, 1900-1933)와 결혼하였다. 또한 주기철 목사는 이기선 목사에게 큰 감화를 받아 마침내 1922년 3월, 25세의 나이로 평양의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5년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이듬해인 1926년 1월부터 부산 초량교회에서 위임목사가 되었다.
어디 주기철 목사뿐이겠는가. 한국 교회사에 길이 빛날 주남선(朱南善, 1888-1951), 최상림(崔尙林, 1888-1945), 방계성(方啓聖, 1887-1949?), 이약신(李約信, 1897-1957), 손양원(孫良源, 1902-1950), 정양순(鄭良順, 손양원 목사의 사모) 등도 이 시기 이기선 목사에게서 양육을 받은 제자들로 후일 신사참배 반대 투쟁에 함께 하며 고통을 받았다. 또한 주기철 목사의 장남인 주영진(朱寧震, 1929-1950) 전도사 역시 해방 이후 북한에서 이기선 목사의 신앙관을 따르는 혁신복구파(革新復舊派) 소속으로 목회를 하다 공산정권에 의해 순교의 길을 걸었다.
한편 경남노회가 성장되어 가자 평북노회에서 이기선 목사를 청빙하였다. 노회장을 지낼 정도로 명망이 있던 이기선 목사의 지도력이 꼭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에 이기선 목사는 52세의 나이로 1930년 8월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威遠面) 백마동에 위치한 백마교회(白馬敎會)를 시무하던 중, 내부의 분규로 교회가 해체될 위험에 처한 위화면(威化面) 북하동교회(北下洞敎會)의 요청을 받아 1931년 2월부터 1938년 7월까지 담임목사로 봉직했다.
이기선목사의 열정적인 사역으로 곧 교회는 안정되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그의 지도하에 성경공부를 하던 청년들 중 교역자가 된 이가 무려 72명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 김창인(金昌仁, 1917-2012), 심을철(沈乙鐵, 1910-1950?) 목사와 박의흠(朴義欽) 전도사를 들 수 있다. 김창인 목사는 해방이후 월남하여 1953년 서울에 충현교회(忠賢敎會)를 설립하고 거대교회로 성장시켰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이 충현교회의 장로로 시무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김을철 목사와 박의흠 전도사는 이기선 목사의 지도로 교계에 입문하였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해방이후 북한교회의 재건에 힘썼는데, 6.25 동란 중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이후 일제는 노골적으로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을 추진하였다. 한글과 한국사에 대한 교육이 금지되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이 강제되었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것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신도(國家神道)를 국민의례로 강요하였다. 이는 사실상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명백하게 기독교의 우상숭배와 관련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억압적 분위기 속에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신사참배를 수용하였다. 이기선 목사는 이 상황에서 신사참배반대 투쟁을 벌리기 위해 1938년 7월 북아현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각지를 돌며 신사참배반대운동을 벌여 해방될 때까지 6차례나 검속되었고 참혹한 고문과 감옥생활을 7년간이나 겪어야 했다. 특별히 이기선 목사는 김의창(金義昌, 1887-1962) 목사와 함께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돌며 순회강연을 하였고, 1939년 4월 하순 평양의 채정민(蔡廷敏, 1872-1953) 목사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선교회를 설립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기선 목사는 1940년 5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위반, 천황에 대한 불경(不敬), 보안법(保安法)위반, 육군형법(陸軍刑法)위반의 죄목으로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45년 8월 17일 출옥할 때까지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일본 형사들의 모진 고문 속에서 이기선 목사는 ‘3자’를 내세워 저항했는데, 즉 첫째 때리면 ‘맞자’, 둘째 가두면 ‘갇히자’, 셋째 죽이면 ‘죽자’가 그것이었다. 그의 제자인 고(故) 김정덕 목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고등계 형사들이 다음과 같이 심문하였다. “영감, 예수 왜 믿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믿소.”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를 믿으면 나중에 어디 가오?” “천당 가오.” “아니 믿으면 어디 가오?” “아니 믿으면 지옥 가오.” “그래요. 한 가지 더 물어봅시다. 황송하옵게도 천황폐하께서도 예수 믿지 않는데 천황폐하는 어디가오?” 이 목사는 누구든지 예수 믿어야지 예수 믿지 않으면 천황폐하라도 구원을 얻지 못하고 지옥 간다고 일장 설교를 하였다. “고라(こら)! 천황폐하는 현인신이란 말이야!” 일본 경찰은 천당 보내 주는 것은 천황이 보내 주는 것이라면서 구둣발로 차고 주먹으로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목사는 굴하지 않고 “밥 먹고 똥 싸는 하나님이 어디 있소?”라고 항의했다. 그들은 이 목사에게 불경죄를 추가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고 이틀 뒤 이기선 목사는 출옥하여 함께 감옥에 있던 동지들과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사택에 모였다. 함께 모인 출옥성도들은 고흥봉(高興鳳), 김인희(金麟熙), 방계성, 서정환(徐廷換), 손명복(孫明復), 오윤선(吳潤善), 이기선, 이인재, 조수옥(趙壽玉), 주남선, 최덕지(崔德支), 한상동(韓尙東, 1901-1976) 등이었다. 이들은 주기철 목사가 담임하던 평양의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에서 봉사하며 9월 20일 재건원칙 5개항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교회의 지도자(목사 및 장로)들은 모두 신사에 참배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정화한 후 교역에 나아갈 것. 2.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할 것. 3.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4. 교회 재건의 기본원칙을 전한 각 노회 또는 지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이것을 실행케 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그러나 이 요구는 기존에 총회장을 지내면서 신사참배를 결정한 홍택기(洪澤麒, ?- 1950) 목사를 중심으로 강력한 반발이 일어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더군다나 공산정권에 의한 기독교 탄압은 신사참배를 강요한 일제의 탄압을 능가하였다. 1946년 7월 3일이 주일임에도 불구하고 북한 공산정권은 선거를 강행하여 기독교계와 큰 충돌을 빚게 되었다. 이기선 목사는 신사참배가 십계명의 1, 2 계명을 어긴 것이라면 주일투표는 3, 4 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이에 더해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의 외척인 강양욱(康良煜, 1903-1983) 목사가 김익두(金益斗, 1874-1950) 목사 등을 포섭하여 만든 조선기독교도연맹(朝鮮基督敎徒聯盟)이 김일성과 공산정권에 대한 절대 지지를 표현하면서 오도연합노회(五道聯合老會)와 마찰이 고조되었다.
이기선 목사는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국교회의 회개운동을 지속적으로 이끌었다. 또 심을철 목사(당시 전도사)가 시무하던 신의주 제6, 7교회가 성장하면서 기존의 노회 측에서 ‘전도사’가 담임하는 것에 대해 제동을 걸자 이기선 목사는 1947년 1월부터 본인이 담임목사로 봉사하였다. 그러나 한 번 벌어진 틈이 쉽게 메워지지는 않았다. 1947년 3월 의산노회(義山老會)에서 이기선 목사의 무기정직을 내리고 금단령(禁壇令)을 결정하면서 갈등은 더욱 고조되었다. 의롭게 믿음을 지켜온 이기선 목사로서는 기가 찬 노릇이었다.
이어서 이기선 목사를 지지하던 산정현 교회 내에서도 교권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의 반대파와 갈등이 일어났다. 이에 1948년 2월 11일 성도들이 교회건물을 반환하고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새롭게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들은 이기선 목사 중심의 혁신복구파를 선택하여 예배당을 포기함으로써 교회 분란을 잠재웠던 모범적인 교회로 이후 혁신복구파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중요인사로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투옥되었던 대부분의 인사들로서 방계성 목사, 채정민 목사, 심을철 목사, 오윤선 장로, 장기려(張起呂, 1911-1995) 장로 등이었다. 이에 1948년 10월 이기선 목사는 교회 혁신에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조선예수교장로회 공동의회를 소집하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평양성경연구회(平壤聖經硏究會)를 설립하고, 이 조직이 신학교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마침내 기존 교회와 함께 사역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이기선 목사는 1949년 3월 재건원칙에 동의하는 교회를 중심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로회(獨老會)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공산당의 탄압은 날로 그 정도가 심해졌다. 1949년 12월 27일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시무하던 방계성 목사를 공산당원들이 납치해 갔다. 이어 1950년 봄에는 심을철 목사가 납치되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주님 안에서 헌신적인 사역을 해 온 이기선 목사는 1950년 6.25 동란이 발생하고 공산당이 수세에 몰리던 그해 겨울 공산당에 의해 체포되어 연행된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에 의해 순교하였음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 다만 장기려 장로 등이 동란으로 대한민국으로 남하하여 가난한 빈민들을 무료로 진료하기 위해 한상동, 전종휘(全鍾暉, 1913-2007, 서울대 의대교수, 前 가톨릭대 병원장, 인제대학교의 총장), 전영창(全永昌, 1917-1976, 거창고등학교 설립자) 등과 복음병원(福音病院)을 세우고 봉사하며 이기선 목사의 신앙을 이어가려소 힘을 모았다. 복음병원은 이기선 목사와 함께 출옥성도였던 한상동 목사가 중심이 된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총회 재단으로 편입되었으며, 1970년에는 고신대학(高神大學) 설립인가와 동시에 학교법인 고려학원(高麗學園)의 수익기관으로 편입되었다.
이기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 정신은 그의 가르침을 받은 주기철, 방계성, 심을철, 손양원, 이약신, 한상동 목사와 장기려 장로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측과 신앙의 정신은 일맥상통하지만, 한편으로 고신 측과 연합전선을 형성치 못하고 별도로 1949년 5월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30여 교회가 호응하여 독노회를 구성하여 혁신 복구파로 불렸다. 이들은 이북5도 연합회와의 관련도 끊고 독자적인 교단으로 출범했다.
참고문헌 안용준.『태양신(太陽神)과 싸운 이들』. 세종문화사,1972.
김양선.『韓國基督敎解放十年史』. 대한예수교장로회종교교육부, 1956. <저작권자 ⓒ 최재건의 역사탐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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