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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기독교

한글의 재 창조의 주역

최재건 | 기사입력 2022/01/25 [03:38]

한글과 기독교

한글의 재 창조의 주역

최재건 | 입력 : 2022/01/25 [03:38]

한글과 기독교 (개정)

 

뉴스파워] "기독교, 한글 보급에 절대적 공헌"한글은 창제된 것은 1443년이었다.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과 더불어 훈민정음이라고 발표한 것은 1446년이었다. 천주교나 개신교 즉 기독교는 처음 전파되고 수용될 때부터 한글과 공생의 관계라고 불릴 정도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서학이라고도 불린 천주학은 조선 후기에 양반과 중인층에 의해 서책을 통해 수용되었다. 천주학이 계층을 넘어 확산되자 식자층 신도들은 한문을 모르는 신도들을 위해 교리서나 발췌 성경 등을 한글로 번역하여 필사본으로 유통되게 하였다.

 

학문적인 호기심에서 서학(西學) 연구에 몰두하던 서학도들이 1784년 조선천주교회를 창립 했다. 천주교회가 급격히 확산되자 조정은 이를 막기 위해 국력을 기우려 전국적으로 천주교 박해정책을 펼쳤다. 정조 때 권력을 쥐었던 남인세력을 타도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배후에 있었지만, 제사를 철폐하고 임금과 아비를 공경하지 않는다고 하는 무부무군의 사악한 종교라는 이유였다. 조선왕조는 천주학을 박멸하기 위해 전국에 한문과 아울러 처음으로 한글방을 붙였다. 1801년 전국적인 신유박해 때 양반층 위주로 300여명의 순꾜자가 나온 후척사윤음(斥邪輪音)’을 전국에 공표 한 것이었다. 천주교인 가운데 한글을 아는 자가 많아 그들에게 천주교가 사악한 종교라고 홍보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서민층 이나 부녀자들에게 확산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결과는 조정의 의도와 달리 전국에 붙여진 척사윤음을 읽고 오히려 천주교는 전국에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에도 조정은 계속 한문을 공용어로 쓰고 천대 받던 한글이 본격적으로 전국에 두루 확산 될 수 있게 된 것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내한한 후의 일이었다. 스코틀랜드 국교회의 파송을 받아 1882년에 만주에서 선교한 존 로스는 신약성경을 번역하기시작하여 1887년에 예수성교전서를 간행했다. 최초의 문법책- 조선어첫걸음 도 처음으로 가로쓰기를 단행하여 간행했다.

 

언더우드 중심으로 한글을 선교 공용어로 정한 것은 1892년이었다. 1893. 1. 장로회 공희회가 한글 전용정책 채택 모든 문서는 한문을 섞지 않고 순전히 한글로만 기록한다.” 그런 것에 대해 한글학자 최현배는 기독교 때문에 한글이 살고 한글 때문에 기독교가 빨리 전파될 수 있었다고 기술하였다.

독립신문, 조선그리스도인 회보, 그리스도신문 같은 신문 잡지를 한글로 만들어 보급하였다. 성경도 번역화시 시작하여 신약이 완간 된 것은 1900, 구약이 완간된 것은 1910년이었다. 신구약 완간과 동시에 성경개역위원회를 만들어 보다 잘된 번역의 출판을 시작했다. 각 교회에서는 야학을 세워 문맹 퇴치 운동을 시작하여 오래 동안 지속하였다. 소련의 문맹퇴치 운동에 영향받아 동아일보를 비롯해서 브나르도 운동보다 훨씬 이전 부터였다. 초기 선교사들은 신문, 사전, 문법, 회화책을 만들어 보급했다. 한글이 국가 공용어로 공표된 것은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 이승만대통령 때였다.

 

성직자 선교사로서 조선에 가장 먼저 내한한 언더우드 (H. G. Underwood)는 선교공용어로 한글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글의 우수성과 사용에 편리함을 깨달은 그는 말하는 것과 글로 쓴 것이 다른 것을 보고 언문일치를 가장 먼저 주장했다. 그 실현을 위해 푸트공사와 함께 내각의 수장인 김홍집을 초빙하고 말과 글을 같이 쓰자고 건의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말씀 하시기를말로하고 글은 야소 왈하고 한문으로 쓰는 것을 탈피 하자고 했으나 김홍집은 그런 상놈들이 쓰는 글자를 사용할 수 없더고 일축하였다. 그러나 언더우는 이후 성경을 필두로 모든 기독교 선교 간행물은 언문일치 하여 한글로 간행했다.

 

 

언더우드는 먼저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간행하였다. 이 사전은 병인박해 무렵 프랑스 신부들이 만든 한불자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언더우드는 자기가 처음 간행한 책들을 보완하고 싶어 했으나, 그것의 개정ㆍ출판을 성취한 것은 그의 아들 원한경이었다. 韓英文法1915년에 출간되었고, 韓英字典은 오성근 등의 도움을 받아 1917년부터 개정을 시작하여 1923년에 완성되었다. 요꼬하마의 인쇄소가 지진으로 무너져 필사본 원고가 소실되는 등의 많은 난관을 겪다가 원본이 한국에 남아 있어 우여곡절 끝에 1925년에 英鮮字典으로 출간되었다. 이 일은 연세대학교가 한국어 학당을 세워 한글 교육의 한글연구와 문법책과 사전 편찬의 전통을 이루는 데에 정신사적 원류의 구실을 하였다. 이 학교가 최현배, 김윤경, 허웅의 국어학자를 배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언더우드는 연이어 선어문법(1899)과 한글 회화책을 간행하였다. 1894년에는 곡조에 가사를 붙인 찬송가도 간행하였다. 그 외 신문, 전도책자 등을 모두 한글로 간행하게 하였다. 성경도 이미 만주에서 번역된 로스의 예수셩교젼서나 이수정이 일본에서 간행한 신약전서마가전언해등을 이북지역의 용어들이 많아 그대로 사용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새로 번역키로했다. 처음 입국할 때 가져온 이수정의 번역본인 마가가 전한 복음서언해는 너무 한문 위주여서 다시 번역하기 시작하여 1896년에 출판하였다. 1887년에는 성경번역위원회를 구성하여 성경 전체 번역작업의 대장정에 들어갔다. 1901년 무렵 신약의 번역이 이뤄지고 1910년에는 구약까지 완역되어 출판되었다. 놀랍게도 바로 그날부터 성경번역위원회는 해체되었지만 성경개역위원회를 구성하여 새로운 번역에 착수하였다. 1895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성서공회가 41년간 반포한 성경의 총수는 18,079,466권이나 되었다. 그런데 1930년대 말 신구약성경이 개역될 때 조선 성서공회는 조선어학회의 구개음화에 따른 표기를 요청받고 반영하지 않았다. 19526.25 동란의 와중에 뒤늦게 이를 시행하였다.

 

1893년에는 언더우드가 그의 명의와 자비로 찬양가란 이름의, 악보가 있는 찬송가를 출판하였다. 한국 최초의 사성부 악보로 된 책이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이들도 극소수였던 때에 악보를 읽을 수 있는 한국인은 없었다.

 

세계의 많은 문자들 가운데 한글이 배우기 쉽고 언어학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널리 알린것도 선교사들이었다. 그 첫 공로는 헐버트였다. 그는 Korean Repository 라는 학술지를 주간하며 한글의 우수성을 세게에 알렸다 대지라는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이 한글의 우수성을 언급한 것은 훨씬 후였다. 헐버트는 중국만 알고 지내던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사민필지라는 한국 최초의 지리교재도 간행하여 세계를 소개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 초기에는 한글사용과 문맹자 실태가 언급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한기독교인들은 글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극소수였다. 1930년대에도 전국민의 문맹률은 10%대였다. 1945년 해방되자 미니지로 총독이 한국을 떠나며 무식한 조선 민중을 18%나 글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큰소리치고 떠났다.

 

109일은 한글날이다. 1926년 조선어연구회는 처음에 가갸 날이라고했다. 1928년에 한글날로 개칭되었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후 한글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도 고조 되었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 가운데 글자를 만든 날을 기념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

 

한글의 학문적인 연구도 앞서 언급한 헐버트 선교사가 1891년 육영공원 교사로 내한했다가 선교사로 사역하게 되었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국문 연구소를 설치하여 주시경이라는 한글 학자를 배출키도했다. 상동교회에서는 선교사와 주시경을 비롯한 조선인들이 함깨 모여 갑오개혁 이후 국문이라고 호칭하고 국어 강습소를 설립하여 한글의 보급에도 기여했다. 여기에서 최현배 김윤경, 이윤재 등의 기독교인 한글학자가 다수 배출되었다.

 

한글날은 해방 직후에 최현배와 같은 걸출한 한글학자의 노력에 의해 국가 공휴일로 제정되었다. 그는 한평생 겨레말, 한글 연구에 헌신하여 우리말본등의 저서를 남겼다. 한글전용운동도 펼치고 한글을 알파벳처럼 가로로 풀어쓰기 방안도 제시하고 또 실현시키려 애썼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한국교회는 1930년대 문맹 탈피를 위한 동아일보의 브나르도운동 보다 훨씬 이전이었다. 선교 초창기부터 교회당에서 밤마다 야학을 열어 한글강습을 병행하였다. 대개의 경우 세례문답의 제1조는 성경지식이나 신앙과 교리에 관한 것 보다 글을 읽을 줄 아십니까?’였다. 필자는 1940년대 후반에도 글을 배우자는 제하의 설교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초기의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선구적 노력을 이어받아 한글 연구와 발전에도 공헌하였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한글연구의 전문가가 배출되었다. 곧 거기에서 주시경, 최현배. 김윤경 등등의 한글 학자가 배출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우리말 큰사전이 준비되었다. 일제 말에 이 사전의 출판을 시도한 것이 알려지면서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에 연류된 기독교인들 중에 이윤재 등은 함흥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그들은 우리말을 사랑하다가 목숨까지 바친 호국과 순국의 자세를 보여 주었다.

 

 

 

한 민족의 언어와 문자는 기본적으로 의사소통의 기능을 갖지만, 문화형성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무지한 백성들을 어여삐 본 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글 창제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의 반대와 천시 속에서 한글은 명맥만 유지되었다. 어진 임금의 뜻을 헤아린 적은 무리의 백성들에 의해서였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노력 외에도 한국교회는 수많은 종류의 잡지를 간행하여 아름다운 전통은 한국교회에서 이어져왔다. 그 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한글학회를 비롯한 여러단체들이 우리말과 우리글을 대중화하고 활성화하는 데에 앞장섰다. 한글을 사랑하고 주류세력은 이제 기독교계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되었다. 한글학자가 다 기독교인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한글이 컴퓨터 시대에 더 널리 활성화 되도록 나라 말, 한글을 발전시켜 온 전통은 한국교회가 이어가야 할 훌륭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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