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튼가의 한국선교: 4대에 걸친 한국선교사
미국의 남,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들 가운데서 4대에 걸쳐 한국선교사로 봉사안 가정은 2가정 뿐이다. 북 장로교의 언더우드가와 남 장로교의 린튼가이다. 언더우드는 무지한 백성들을 깨우기 위하여 교육선교에 매진하여 연세대학교를 창립했고 린튼가는 2세대에 가서 해방된 한국에 인재 양성이 급선무라고 여겨 한남대학교를 설립하였다.
두 가문의 자녀들 모두 4대에 걸쳐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의 남북장로교는 1983년에 하나가 되었지만 린튼 가문은 미국남부의 신앙 전통 따라 보다 보수적이었다. 4대째인 스티브 린튼의 경우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신학교는 연대나 장로회신학대학교가 아닌 보다 보수적 신학성향의 고려신학 대학원을 나왔다(M. Div.).
언더우드가는 연세대학을 중심으로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으나 린튼가는 파송 선교부의 선교지역인 호남 중심으로 활동했다. 자녀들의 교육도 언더우드가는 주로 가문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뉴욕에 유학을 보냈으나 린튼 가문은 한국의 학교에서 한국인들과 함께 교육을 받도록 한 것도 특기할 점이다.
언더우드가는 부계만 4대에 이어 한국선교에 기여했으나 린튼가는 1세대는 모계로 시작되었다. 유 진 벨(Eugene Bell, 배유지1868-1925) 은 구한말에 미국의 남장로교에서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였다. 유진 벨은 첫번째 아내 로티 위더스픈(Lottie Witherspoon Bell, 1867-1901)과 함께 1895년 4월 한국에 도착했다. 그가 한국 땅에 들어와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며 교육과 의료 사업을 벌인 이래, 그의 한국 사랑은 자손들에게 4대째 이어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국선교 1세대인 유진 벨과 린튼 가문의 한국사랑은 북한에도 유진 벨 재단을 통하여 많은 사역을 펼치고 있다. 실로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어 오고 있다.
린튼가의 선교사들을 비롯하여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서울이 아닌 지방선교를 담당하여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설립하였다. 교회가 설립된 곳을 중심으로 남학교와 여학교를 세워 미국식 교육을 통해 문맹퇴치와 함께 호남지역에 신학문을 도입하였다.
1900년도 초에 설립된 전남지역의 대표적인 학교는 목포에 정명여학교(1903)와 영흥남학교(1903)가 있고, 광주에는 숭일학원(1907)과 수피아여학교(1908)가 있으며, 순천에는 매산학교(1910)가 있다. 이 학교들 중 목포 정명여고와 영흥고, 그리고 광주 숭일학원과 수피아여고는 벨이 직접 관여하여 설립한 학교들이다. 해방 후에는 한국에 필요한 것응 인재라고 고등교육에도 투자하여 대학도 세웠다.
1대: 배유지(Eugene Bell, 裴裕祉, 1868-1925)
언더우드 선교사가 1891년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의 모교회에 조선선교에 대한 보고를 했다. 또한 조선으로 올 선교사들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언더우드는 교단의 차원을 넘어 테네시(Tennessee) 주 내쉬빌(Nashville)에서 열리는 전국 신학생 선교연맹 (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에 참석하여 조선 선교를 호소하였다. 전킨 선교사등 선교 지원자가 생겨났고, 남장로교는 조선(한국)에 선교사 파송을 결정했다. 제1차는 1892년 7명을 파송하ㅇ였고 뒤이어 1895년 4월 9일 유진 벨 선교사와 오웬 선교사를 파송했다.
유진 벨은 미국 켄터키(Kentucky) 주 스캇(Scott)에서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미국 1891년 켄터키주 센트럴대학(Central University)을 졸업하고, 1894년 켄터키 신학교(Kentucky Seminary)를 졸업하였다. 목사안수를 받고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27세 때 조선에 왔다. 서울에 도착한 배유지 선교사는 나주로 부임하기 전에는 하위렴(W.R. Harrison) 선교사와 함께 서울에서 조선어 훈련을 받았다.
벨 선교사는 전남선교회가 설치된 나주에 부임하였다. 초기의 주한 선교사들은 교계예양이라는 이름아래 각선교회간의 중복을 피해 지역을 나누어 선교 활동을 벌였다. 전라도 선교는 미국의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에 맡겨졌다. 이에 따라 유진 벨 선교사는 광주를 비롯한 전라남도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1895년 9월 6일 나주읍에 최초로 나주장로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곳의 유림(儒林)들과 양반들의 텃세가 심해 외국인에 대한 반발이 커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가 없었다. 나주에서 유림들과 양반들의 텃세가 심해 정착하기가 어려웠다. 1897년 10월 1일 서해안에 새로 개항된 목포로가서 이듬 해 목포선교지회를 개설하였다. 유달산이 바라다 보이는 목포 양동 공동묘지 끝자락에 겨우 선교사들의 주택과 교회당을 겸해서 사용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뒤따라 부임한 의료 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 吳元) 및 여선교사 스트레퍼(Straffer, Fredrica) 등과 함께 전도 및 부녀자 계몽에 나섰다. 오웬은 목사이면서 의사였기 때문에 목포진료소를 설치하여 주민들을 상대로 진료 할 수 있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주로 해남, 진도, 완도, 강진, 장흥 지역민들이었다. 오웬이 이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목포진료소에 대해 선전을 하여 소문이 났었다.
배유지 선교사는 응접실을 만들고 변창연(邊昌淵)으로 하여금 관리 겸 결신자들을 위한 상담실 역할을 하게 했다. 1900년 3월 5일 4명의 교인으로 목포에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해 여름에는 30명의 세례 지원자 중 6명이 문답에 합격해 세례를 베풀었다. 8명의 원입교인도 증가했다.
1901년 4월 순회전도 여행 중 배유지 목사는 미국에서 결혼한 첫 번째 부인 배주량(Lottie Witherspoon Bell, 裵周良)을 잃었다. 로티 위더스픈은 심장병에 걸려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집에 남겨 두고 전도 여행하는 중에 홀로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양화진에 묻혔다. 벨 선교사는 그의 아내 로티 위더스픈 사이에 헨리(Henry Bell)와 샬롯(Charlotte Bell) 두 자녀를 데리고 일시 미국으로 귀국하였다가 1902년 가을에 다시 내한하였다.
그는 목포지회에서 선교사역을 계속하여 1903년에 이르러서는 목표교회 교인수가 계속 증가하여 200명에 이르렀다. 배유지 선교사는 200명 이상의 교인을 수용 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그는 석조(石造) 예배당을 완공하여 목포선교지에서 별세한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해 로티 위더스푼 벨(Lottie Whidespoon Bell)기념 교회당이라 명명하였다.
유진 벨 선교사는 슬픔속에서도 교육과 의료 사역에도 중점을 두어 처음 선교활동을 편 목포에 정명학교와 영흥학교를 세웠다. 마차를 타고 먼 지역에 까지 전도 여행을 하여, 나주, 목포, 광주 지역에 여러 교회가 세워지고 기독교 신자들이 많이 늘어났다. 그는 실로 '호남 선교의 선구자'였다.
벨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그 지역의 최초 또는 어머니교회로 불리는 교회들이 다수 있다. 목포의 경우 목포 거점 선교지회가 준비되면서 시작한 양동교회, 양동제일교회, 새한교회, 그리고 목포창조교회는 목포의 초대교회이다. 광주 부근의 경우 잉계교회(우산리교회, 삼도교회, 송정중앙교회, 송정제일교회)가 광주의 초대교회이다.
1904년 봄에 개최된 남장로교 한국선교회(Mission Conference)에서 광주선교지회(Mission Station)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배유지 목사는 그 책임자로 결정되었다. 그는 광주가 전남지방의 중심 도시로 발전될 것을 예견하고 광주지회를 신설할 꿈을 꾸어 왔고, 오웬 선교사와 함께 1904년 12월 성탄절 아침에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에 첫 광주교회를 설립하였다. 양림리교회는 광주읍성 내 북문안으로 이전하여 북문안교회(광주제일교회, 광주중앙교회, 광주양림교회)가 되면서 광주읍성의 초대교회가 되었다.
1908년 그의 사랑방에서 몇 사람의 여학생을 모아놓고 이듬해엔 남학생까지 모집해 성경을 가르친 것이 시초가 되어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의료선교에도 관심을 가져 광주기독병원(당시 제중병원) 탄생에 산파역도 감당하였다.
호남선교의 대부일 뿐만 아니라 그는 수년 동안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아울러 노회와 총회의 일에도 앞장서서 교회를 조직화, 제도화, 기구화 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1907년 독노회로 출범한 조선의 장로교회는 1911년 10월 15일엔 전주에서 전라노회가 창립 되자 그를 노회 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창립되었고 1914년 황해도 재령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에서 모인 제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는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그가 재임했던 장로교총회 중요결의 안건들은 만주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하고, 주공삼씨를 동경연합교회(현 동경한인교회) 선교사로파송키로 하며,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유진 벨은 1904년 마가렛 벨(Margarlet W. Bell)과 재혼했으나, 마가렛 벨 마져 1919년 3월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을 조사, 취재하고 광주로 돌아오다가 병점역에서 열차와 자동차가 충돌하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와중에도 배유지 선교사 자신도 격무와 과로로 결국 1925년 9월 28일 57세로 광주선교지회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자택이었던 양림동의 집은(2층 양옥) 현재까지 <벨기념관>으로 남아있다.
조선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과 선교의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는 일을 지원하였고, 전남 전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다. 세워진 교회는 훈련된 한국인 조사(助師)나 전도인이 직접 목회하도록 하고 자신은 담임 지역 전체를 순회하면서 여러 교회 형편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그의 모교인 켄터키 주 중앙대학교는 1920년 그에게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했었다.
유진 벨 선교사의 사역은 그의 사후에도 후손들에 의해 한국 땅에서 선교 사업을 계속해나왔다. 유진 벨의 딸 샬롯 벨은 어머니 로티 위더스픈의 사후 성장기와 교육은 미국에서 보내었고 교육도 거기서 받았다. 샬롯은 성인이 되어 한국선교사역중인 아버지를 방문했다. 이때 한국 선교를 위해 군산에서 활동하던 윌리엄 린튼(William A. Linton, 1891~1960)을 만났다. 샬롯 벨과 윌리엄 린튼의 마남은 결혼으로 이어졌고 두 가문의 연합 한국선교사역이 대를 이어 이루어지게 되었다.
2대: 한남대학교의 설립자인 윌리엄 린튼
한남대학교(韓南大學校)의 설립자인 윌리엄 린튼(William Alderman Linton, 仁敦, 1891-1960)은 1891년 2월 8일 미국 조지아(Georgia) 주(州) 토머스빌(Thomasville) 근교에서 태어났다. 윌리엄 린튼은 아버지 와이츠 와델 린튼(Wyche Waddell Linton)과 어머니 아만다 폰더 올더만(Amanda Ponder Alderman)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린튼 가문은 남부에서 규모 있는 농장 운영으로 경제적으로 유복한 편이었다.
윌리엄 린튼의 어릴 적 생활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1892년 7월 큰 누나인 모드 엘라(Maude Ella)가 사망했다. 3개월 뒤 10월에 여동생 칼리(Callie Annie)가 태어나났다. 하지만 2년 뒤 둘째인 형 와이츠 2세(Wyche Jr.)가 또 세상을 떠났다. 두 아이를 떠나보낸 아버지 와이츠 린튼과 어머니 아만다는 그 집을 떠나 1899년 타운으로 이사했지만 안타깝게도 칼리마저 일곱 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마침내 윌리엄 린튼이 10살이 되던 해에 그의 부모는 각각 별거 상태에 들어갔다. 그의 아버지는 시골에서 선생으로 일하기를 원했지만 어머니는 가문의 부동산을 계속 관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외아들이 된 윌리엄 린튼은 어머니, 그리고 곧 이사를 온 이모 칼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 이러한 아픔 속에서도 린튼은 어릴 적부터 조용하고 착하게 성장하였다. 감리교인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윌리엄 린튼은 세례까지 감리교회에서 받았다.
점차 소명의식에 눈을 뜨면서 장로교회로 교적을 옮기게 되었다. 당시 그는 교회학교 교사인 신시아 맥클린(Cynthia McLean)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그는 자신의 내면에 담겨 있던 외로움의 실체를 밀어내고 그 대신 하나님의 실체를 차곡차곡 쌓아 가는 과정에서 보편적인 인간 삶에 대한 소명의식을 품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윌리엄 린튼은 늘 공부하고 사색하는 성격으로 우등생이었다.
16세가 되던 1907년 윌리엄 린튼은 고향을 떠나 애틀랜타(Atlanta)로 가서 조지아 공대(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에 입학하였다. 이듬해인 1908년 5월 19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감리교 신자였으며 때문에 윌리엄도 세례는 감리교에서 받았다.
어머니의 사망 후 대학교 3학년 때부터 1909- 1911년까지 그는 기숙사에서 나와 남장로회 노스애비뉴 교회의 장로이자 의사로 웨스트 피치가(West Peach Street)에 있는 헐(M. M. Hull) 박사 댁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린튼은 신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일상생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려고 노력 하게 되었다.
대학생활은 처음에는 예비학급 학생이었지만,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1912년 졸업할 때에는 수석학생이 되었다. 그는 성적뿐만 아니라 재학생 가운데 가장 도덕성이 강한 학생이었다. 윌리엄 린튼의 이러한 면면은 어릴 시절부터 가까이 지내던 벗, 로자(Rosa May King) 양의 추모편지에 잘 담겨 있다.
인돈과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우리가 초등학교 학생이었을 때였다. 그는 토머스빌의 소학교에 다녔고 나는 애틀랜타의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의 어머니인 아만다, 이모인 칼리와 나의 어머니는 그들이 결혼하기 전부터 서로 알고 자내던 사이였다. 인돈과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이모는 어느 여름에 우리 집에서 몇 주 동안 머문 일이 있었다. 그는 조지아 공대에 들어갔는데, 그의 어머니는 그가 공대를 다니고 있을 때 돌아가셨다. 그는 어머니를 많이 따랐기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이 그를 몹시 슬프게 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는 조지아 공대에서 성적이 좋았을 뿐 아니라 재학생 가운데 가장 도덕성이 강한 학생이었다. 그가 그의 삶을 완전히 기독인으로 헌신하고 외국 선교에 몸 바치겠다고 결심한 것은 조지아 공대 재학 중 노스 애버뉴(North Avenue)의 장로교 교회에 다니던 때였다. 그 당시 이 교회에 계시던 의사 헐 박사의 영향이 컸다.
윌리엄 린튼은 변요한(John Fairman Preston, 邊約翰, 1875-1975) 선교사의 영향으로 한국 선교사로 지망하게 되었다. 1903년 한국 선교사로 파견되어 목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변요한은 1911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체류중이었다. 33명의 새 선교사를 선발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눈에 윌리엄 린튼이 들어 왔었다. 윌리엄 린튼은 1912년 4월 9일 그의 나이 21세 때 미국 남장로회 해외선교부 실행위원회가 교부한 조선선교사 임명장을 받게 되었다.
윌리엄 린튼은 여름방학 동안 그를 끔찍이 사랑해 주단 이모와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의 산으로 들어가 명상하며 한국행을 결심하였다. 이모는 친자식과 같던 그와 헤어지는 것을 몹시 서운해 하였다. 마침내 같은 해 8월 23일 윌리엄 린튼은 변요한 목사와 함께 한국을 향해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를 출발하였고, 9월 20일 증기선 만추리아(Manchuria)호로 목포(木浦)에 도착하여 선교 사역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목포에 도착한 후 윌리엄 린튼은 1913년 한국어 선생으로 고성모 조사(후에 장로교 총회장 엮임)를 만나게 되었다. 고성모 조사는 도대선(Samuel K. Dodson) 선교사를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이후 윌리엄 린튼과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한 윌리엄 린튼은 1914년부터 군산(群山)의 영명학교(永明學校)에서 한국어로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후 그는 1917년부터는 영명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해 여름휴가 때 일본의 가루이자와(輕井澤)를 방문하여 어학 전문 교사였던 커밍스(Thomas F. Cummings) 박사를 만났다. 윌리엄 린튼은 커밍스 박사로부터 그동안 매우 어려웠던 한국어 발음을 교정 받았는데, 큰 효과를 본 뒤 이 방법을 남 장로교 선교회의 언어 훈련 지침으로 삼게 했고, 한국 학생들에게 역으로 영어를 가르칠 때 사용하여 놀라운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1919년 일어난 3.1독립운동은 윌리엄 린튼에게도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이를 지켜보면서 선교 사역의 방향을 교육으로 정했다. 당시 일본제국 경찰은 그가 만세시위를 배후에서 지원하고 지도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의 집과 교회 등을 수색하였다. 일경은 그의 교회에서 독립선언서 등사본 2000매를 발견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 당국은 교장이었던 린튼을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들과 교사들이 만세시위를 선동하였다고 의심하게되었다. 이후 1919년 기독교 평신도회의에 참여하였고 영자신문지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생생히 전하는 글을 기고하였다.
같은 해 5월 4일 첫 안식년을 맞아 윌리엄 린튼은 미국에 갔다. 8월에는 노스캐로라이나 몬트리트에서 열린 남장로교 해외 선교사대회에 참석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3.1 독립운동의 비폭력 저항 정신과 한국의 어려운 실정을 곳곳에서 밝혔다. 그해 가을에 윌리엄 린튼은 뉴욕의 화이트 성경학교(White Bible School)에서 공부하기로 했고, 동시에 컬럼비아대학교 사범대학원의 교육학 과정에 입학하였고, 1921년 교육학 석사를 취득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다시 군산 영명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윌리엄 린튼은 선교부에서는 2년의 학업시간을 허락해 주어 학업연마는 물론 이 기간 동안 이모와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1921년 6월 그는 마침내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즈음 그는 평생을 같이 하게 될 사롯 벨(Charlotte Witherspoon Bell,인사례)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배유지(Eugene Bell, 裴裕祉, 1868-1925) 목사의 막내 딸이었다. 배유지 목사는 전술한대로 1893년에 한국 파견 선교사로 임명된 분이었다. 이해는 남 장로교가 한국에 선교 사업을 시작한 이듬해였다. 1922년에는 사롯 벨과 결혼했다. 사롯 벨은 목포에서 출생하였지만, 청년기를 미국에서 보내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터였다. 결혼식은 조선이 아닌 미국 남장로회 일본 선교회가 있던 고베에서 로간 목사의 주례로 치러졌다.
결혼 이듬해 1923년 4월 1일 큰아들 윌리엄 (William Linton)2세가 태어났고, 1924년 4월 21일 둘째 아들 유진 벨(Eugene Bell Linton)을, 1926년 2월 22일 셋째 아들 휴(Hugh Linton, 인휴, 1926-1984)를, 그리고 1927년 12월 4일 넷째 아들 드와이트(Thomas Dwight Linton, 인도아, 1927-2010)를 낳았다. 큰 아들(William Linton)은 군산에서 출생하여 유럽에서 지내다가 1982년 내한한바 있다. 둘째 아들(Eugene Linton)도 군산에서 출생하였는데, 미국에서 의사로 살았다. 한국으로는 돌아오지는 않았다. 넷째 아들 드와이트(인도아)는 전주에서 1927년 12월 4일 출생하여 광주에서 교육자 및 순회복음 선교사로 그의 부인 마기(Margie)와 함께 1978년 귀국할 때까지 31년간 활동했다.
윌리엄 린튼(인돈)은 1926년 선교본부의 발령에 따라 전주(全州)의 신흥학교에서 공동교장으로 근무하게되었다. 열과 성을 다해 헌신한 윌리엄 린튼은 1928년 6월 29일 두 번째 안식년을 맞아 전주를 떠나 미국 조지아주의 컬럼비아 신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하였다. 1930년 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토머스빌 교회에서 특수 목회를 위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0년 6월 29일 다시 전주로 돌아온 윌리엄 린튼은 신흥학교의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당시의 교육법에 의한 지정학교가 되도록 노력하였다. 마침내 1935년 4월 신흥고등보통학교가 지정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대강당을 신축하기 위해 공사를 시작하였다. 한편 가문 전체가 한국을 위해 헌신하기로 하여 큰아들 윌리엄과 둘째 아들 유진이 순천에서 남장로회가 설립한 매산고등학교를 졸업한데 이어 1936년에는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1937년 일제는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킨 이후 천황(天皇)을 정점으로 하는 신사참배를 교회와 기독교계학교에 적극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전통종교요 그들의 조상신을 숭배하는 신사에 강제로 참배하라는 것은 명백히 종교 자유에 위반되는 것이었다. 특히 기독교 신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는 모든 학교를 폐쇄키로 결정하였고 윌리엄 린튼도 신흥학교를 폐교할 수밖에 없었다. 린튼은 1938년 참담한 마음으로 세 번째 안식년을 갖게 되었다. 가족들과 팔레스타인 일대와 유럽 등 성지를 둘러보고 이듬해인 1939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광기의 전쟁을 추구하던 일본의 군국주의로 한국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태평양 전쟁 발발 전, 1940년 가을 강제로 미국 선교사들을 집단으로 철수토록 했다. 11월 14일 가족들과 함께 윌리엄 린튼은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미국에서 1941년 9월 말부터 윌리엄 린튼은 남장로교 해외선교부 집행부의 부총무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 일제에 의해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시작되었다. 윌리엄 린튼은 종전 후의 계획을 마련하고 헌신적으로 임무를 수행해 5년 동안 다섯 번 이사회로부터 상을 받았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태평양 전쟁이 끝났다. 다시 윌리엄 린튼은 1946년 7월 전주로 돌아와 폐교한 학교의 복원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마침내 11월 26일 전주의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가 복교하게 되었다. 윌리엄 린튼은 교장에 다시 임명되었다. 교육전문가로서 윌리엄 린튼은 해방된 한국을 위해 그간 일제에 의해 사실상 설립이 금지되었던 기독교 대학을 설립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특히 해방된 한국에 필요한 것은 고급 인력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1948년 2월 24일 특별임시위원회에서 4년제 대학교의 설립을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직장암에 걸려 미국에서 수술을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윌리엄 린튼은 1949년 2월 14일 광주에서 열린 특별임시위원회에서 대전에 선교회 교육 중심지의 부지를 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동란이 일어나 대학설립 문제와 숭실대학 재건 문제로 중단되게 되었다. 윌리엄 린튼 역시 7월 16일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이후 전주로 복귀하였지만 1951년 1.4후퇴 이후 다시 전주를 떠나게 되어 전쟁 막바지에는 경상남도 부산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1952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어 윌리엄 린튼은 크게 낙심하였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전쟁은 휴전하게 되었고, 그는 기독교 학교의 재건을 위해 한국에서 더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윌리엄 린튼은 한국의 재건은 일본식의 물질 차원의 건설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재건이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1954년 5월 6일부터 15일까지 전주에서 열린 제8차 연차대회에서 윌리엄 린튼은 다시 한국전 전에 거론되었던 기독교 대학을 세울 책임자로 지명되었다. 그는 6월 3일 대전에서 대학위원회를 소집하여 충남 대덕군 회덕면 오정리에 대학을 세우기로 결정하였고 부지 매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1955년 11월에 윌리엄 린튼은 대전에서 살아 갈 기와집을 짓고 완전히 이사하였다. 건강이 여의치 않는 와중에도 윌리엄 린튼은 1956년 2월 5일 재단법인 미국 남 장로교 한국선교회 유지재단 대표이사 자격으로 문교부 장관에게 대전기독학관 설립 인가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3월 13일 인가를 취득하여 개교하였다. 1948년에 수술을 받기위해 미국 버지니아를 다녀왔지만, 1956년에도 역시 수술을 위해 일본 동경을 다녀왔다. 윌리엄 린튼의 헌신적인 노력은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1957년에는 벨해븐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또한 1958년에는 다섯 번째 안식년을 맞아 휴가를 떠났지만 대학의 본격적인 대학설립 문제로 서둘러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즉 1959년 2월 26일 대전대학(현재의 한남대학교) 설립 인가가 나게 되어서 윌리엄 린튼은 4월 15일 대전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암이 재발하였다. 윌리엄 린튼은 다시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한국의 상황이 걱정이 되어 병원에 오래 있지 못하고 1959년 10월 16일 수술한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대학의 창립, 성장과 발전에 헌신하였다. 문제는 역시 건강이었다. 1960년 상황이 악화되자 윌리엄 린튼은 명예학장으로 추대되었고, 6월 하순 의사들의 권고로 미국에서 치료받기 위해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윌리엄 린튼은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병신’이 되어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한 단호한 어조가 전송객들의 심금을 뜨겁게 하였다. 이 말은 몸이 불편하지만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거나 들 것에 들려 비행기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몸소 걷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사실 1948년의 첫 수술 이래 그가 한 활동은 소명 의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2년 전 이러한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절감했지만, 선교 현장의 마지막 불꽃을 대학교육을 위해 태운 윌리엄 린튼이었다.
차남 유진이 의사로 일하고 있던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로 귀국 한 린튼은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한국 땅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한국의 기독교회와 교육 발전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윌리엄 린튼은 1960년 8월 13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노스캐롤라이나 블랙마운틴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1974년 윌리엄 린튼이 평생을 두고 사랑하며 한국에서 함께 동역한 부인 인사례 여사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인사례 여사 역시 남편과 함께 묻히게 되었다. 그에게는 대한민국정부가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로 3.1운동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로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한남대학교에서 펴낸 『안돈 평전, 윌리엄 린튼의 삶과 선교 사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윌리엄 린튼을 기리고 있다.
그의 후손들은 한반도를 잊지 못한다. 한국인들도 그들을 잊지 못한다. 여수와 순천에서, 그리고 목포와 전주에서 인돈은 매우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사람으로 기억된다. 아주 좋은 우리의 이웃이요, 친구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동시에 대전에 있는 한남대학교는 인돈을 설립의 아버지요, 대학을 이끄는 힘과 정신으로 생각하고, 그 뜻을 실천하고 있다. 어느 한 사람을 우상으로 떠받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한 정신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서이다. 대학의 여기저기에 그러한 숨결이 살아 있다. 인돈기념관과 인돈동산, 인돈학술원, 한남인돈문화상 등은 사라져 가는 인돈 정신을 봉사와 사라오가 헌신을 통한 교육이 실현되도록 하는 잣대로 삼고자 하는 뜻의 표현이다. 뜻있는 사람들이 기금을 마련하여 인돈석좌제와 인돈강좌를 구상하는 것도 같은 의미다, 한남대학교가 기회 있을 때마다 인돈을 기억하고, 정신을 되새기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매우 귀한 일이 될 것이다. 무수히 많은 새로운 인돈이 우리들 속에서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3.대: 휴 매킨타이어 린튼(Hugh MacIntyre Linton, 印休)과 드와이트 린튼(Dwight Linton, 印道亞)
유진 벨로부터 시작되어 윌리엄 린튼 가문으로 이어진 3대째 한국 선교의 사역은 윌리엄 린튼과 샬럿 벨 린튼(한국명:인사례)의 세째 아들인 휴 린튼(印休, 1926. 12/ 7 ~ 1984, 4/10)이 이어 받았다. 휴 매킨타이어 린튼은 1926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났다. 휴는 유아기를 일제 때 전라남도 순천에서 보냈다. 교육은 미국에서 받으며 자랐다. 그의 아버지가 1928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 조지아주의 컬럼비아신학대학원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에서 수학하게되었고, 1930년 목사안수를 받고 돌아왔지만, 1940년 일제 의 선교사 추방령으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휴 린튼은 1947년 5월 로이스 베티(Lois Elizabeth Flowers Linton, 한국명 : 인애자)(영미권에서 Betty는 Elizabeth의 애칭이다)와 결혼했다. 1950년에는 컬럼비아신학교도 졸업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해군 대위로 인천 상륙 작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종전 후 1953년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선교와 의료봉사에 나섰다. 등대선교회를 설립하여 전라남도 순천을 중심으로 도서 지역에 600여 개의 교회를 개척했으며, 그의 아내 인애자와 함께 30여년간 결핵퇴치 활동에도 매진하여, 1960년 순천 일대에 홍수가 나고 결핵이 크게 유행하게 되자, 순천기독치료소를 설립하여 결핵치료에 나서고, 아내 인애자는 순천결핵재활원(현 순천기독결핵요양원)을 설립하여 은퇴할 때까지 결핵퇴치를 위해 헌신하였다.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 부부는 전라남도 섬 지방과 벽지를 돌아다니며 200곳이 넘는 교회를 세우며 도시보다는 농촌과 간척지 사역에 집중하였다. 휴 린튼은 검정 고무신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정도로 검소하고 겸손하게 지역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만년에는 공황장애로 고통받았다. 1983년 10월 10일을 기하여 선교와 목회 분야 은퇴를 선언하여 결국 서울을 떠나 전라남도 순천 승평 원도심촌에 선교활동을 이어갔다.
전라도의 많은 섬과 벽지에서 활약하며 초교파적으로 600여 곳이 넘는 교회를 개척했던 그는 개척초기의 교회들의 자립을 위해서 운영비의 20%를 지급하며 자립을 돕는 등 남도의 마을 입구마다 세워지는 교회 십자가의 불빛을 세상을 향해 비추이게 하는 밑거름이 되주었다. 1962년 순천 일대의 큰 수해로 인한 결핵을 막기 위해 부인 인애자 선교사와 함께 결핵진료소와 요양원를 세우기도 했다. 휴 린튼이 선교사역에 역점을 둔 반면, 아내 로이스 선교사(인애자)는 의료 봉사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로이스는 결핵 퇴치에 목숨을 걸었다. 수많은 이재민과 결핵 환자가 급증했다. 자녀들까지 폐결핵에 걸려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결국 1965년 입원 요양이 필요한 결핵 환자의 진료를 위해 ‘결핵 요양원’이 설립되었고, 무의탁 결핵 환자들을 위한 요양원인 ‘보양원’이 세워졌다.
인휴 선교사는 1984년 4월 10일 뜻밖의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음주운전을 하던 버스와 추돌사고로 휴린튼 선교사는 짚(Jeep)차를 운전하던중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 사고 당시 휴 린튼은 지프차에 농촌 교회 건축에 쓰일 자재를 실은 트레일러를 달고서 시골교회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의 죽음이 그의 가문이 가지고 있는 선교역량에 어떠한 변화도 주지 못했다. 휴린튼의 아내였던 로이스 로이스 베티 (한국명 : 인애자 印愛子) (Lois Blizabeth Flowers Linton)선교사는 결핵 퇴치 사업을 계속하였다. 35년간 결핵 퇴치에 헌신하다가 1994년에 은퇴하였다. 한국인의 결핵 치료와 예방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공로로 1996년 호암상을 받았다.
이때 받은 상금 오천만 원이 존 린튼(인요한) 박사의 한국형 앰뷸런스 개발과 보급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된 것이다. 그전까지는 제대로 된 앰뷸런스도 없어서 택시타고 광주로 가다가 순직한 그의 부친을 생각하고 제작했던 것이다. 휴 린튼선교사는 죽어서도 한국민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주고 갔다.
휴 린튼의 아버지 윌리엄 린튼은 21세에 내한하여 48년 동안 500개의 교회를 세웠고, 그의 아들 휴 린튼은 남도의 섬 오지와 산간 벽지를 순회하며 600여개의 교회를 세웠다. 전라 남도에서만이 서울과 비슷한 기독교 개종율을 볼 수 있는 것도 이들의 공헌에 힘입은바 컸다.
*윌리암 린튼의 4남 드와이트 린튼(印道亞), 1927.12/ 4~ 2010, 1/ 11)
윌리암 린튼의 4남 인도아도 선대를 이어 한국선교에 공헌했다. 그는 1927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출생하여 군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그 후 평안남도 평양에서 자랐으며 그 뒤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후 콜럼비아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미군으로서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전화를 입은 한국을 목도했다. 그 후 1955년, 선교사로 대한민국에 다시 왔다. 광주에서 20년이 넘도록 의료봉사활동으로 전개하였다. 1973~ 1978년에는 5년간 호남신학대 학장을 직을 맡아 신학교발전에도 기여했다.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가 1992년에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방북 때는 통역인으로 동행하기도 했다. 1995년 북한주민을 돕기 위한 ‘조선의 기독교 친구들(Christian Friends of Korea:CFK)’ 설립을 주도했으며 이후 의료와 식량 농기계 비상구호품 우물개발기술 전수 등 대북 인도적 지원활동에 적극 참여해 왔다. 1991년에는 애틀랜타 인근 한인 타운 밀집지역인 덜루스에 한국계 미국인 2세들과 함께 오픈도어 커뮤니티 교회를 열었고, 2006년에는 조지아 세계선교대학을 설립해 이사로 활동해 왔다. 2010년 1월 11일 애틀란타 인근 게인즈빌에 있는 한 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한 뒤 승용차편으로 귀가하다 교통사고로 삶을 마감했다.
4대: 인세반과 인요한
윌리암 린튼의 셌째 아들 휴 린튼 선교사 부부의 6남매는 엄하게 신앙교육을 받았다. 중학생이 되면 107문답의 소요리 문답을 외워야했다. 암송하다 틀리면 매를 맞았다. 신앙과 삶의 가치관 정립을 위한 휴 린튼만의 교육방법이었다. 장남 데이비드(David)는 대전에서 미국 남 장로회 선교사로 활동했다.
3남 스티브(Stehpen W. Linton, 인세반, 1950-현재)는 1950년에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3대째 남장로교 선교사로 재직했던 한국에서 자랐다. 순천의 매산고 및 연세대학교 철학과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과정을 마쳤다. 뉴욕의 콜럼비아대학교에 진학하여 1989년에 '남북한 윤리 및 도덕 교과서'를 비교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콜럼비아대학의 한국학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서 교육받고 자랐기 때문에 남북한의 분단 현실을 목도하였다. 197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대회를 계기로 북한을 방문하게 되면서 '또 다른 한국'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고난의 행군시절이라 불리던 기간 중에 콜럼비아 대학 연구원으로 방북하여 북한의 홍수재난 구호(1995-1996)에 도움을 주었다. 린튼은 현재 북한의 인도적 지원을 주된 업무로 하는 비영리단체인 유진벨재단의 회장으로 재임 중이다.
유진 벨 재단은 유진벨선교사가 1895년 내한하여 선교활동을 한 것을 기념하여 1995년 설립되었다. 1997년 북한의 보건성으로부터 결핵 퇴치 공식 지원 요청을 받아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순천기독결핵재활원 내 해외사업부 소속으로 '유진 벨 프로젝트'가 출범하였다. 북한에 결핵퇴지를 위주로 한 의료지원 사업은 2007년 현재 모두 400억 원이 넘는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북한에 지원했다. 스티브는 1997년부터 50여 차례 북한을 방문했고 북한 전문가로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을 세 차례나 만나기도 했다.
스티브 린튼의 동생 존 린튼(John Alderman Linton, 인요한, 1959-현재)은 매산고와 연세대 의대를 졸업했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가정의학과 교수이며, 세브란스 병원-국제진료센터의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한편현과 더불어 유진 벨 재단을 적극 후원학고 있다. 그는 대한민국 인권상도 수상했다. 인요한은 한국으로 귀화하여 자타가 공인하는 순천 인씨의 시조가 되었다. 인세반과 인요한 두 형제는 모두 한국여성을 부인으로 맞았다.
미국의 세계적 생명공학기업인 ‘프로메가(PROMEGA)’ 대표인 빌 린튼 3세는 윌리엄 린튼 목사의 장손(長孫)으로 인세반, 인요한과는 사촌 간이다. 그는 할아버지가 설립한 한남대를 2004년 방문해 500만 달러 재정지원을 약속했고, 이후 한남대에 프로메가 BT 교육연구원이 설립되었다.
이밖에도 린튼 가문은 1995년 북한주민을 돕기 위해 인도주의단체 ‘조선의 기독교 친구들(Christian Friends of Korea:CFK)’를 설립해 의료와 식량, 농기계, 비상구호품, 우물개발기술 전수 등 인도적 지원활동을 적극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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